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판도라 ❸

영화 ‘판도라’는 기계적이고 극단적인 양자택일兩者擇一 방식이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또한 그 선택권이 무능하고 이기적인 권력자의 손에 쥐어졌을 때 힘없는 개개인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보여준다.

▲ 양극화의 해법은 모두를 배려하는 공정한 양자택이兩者擇二에 있다.[사진=아이클릭아트]
영화 ‘판도라(Pandora)’는 재난 블록버스터답게 얼마든지 상상 가능한, 그러나 상상하기조차 싫은 끔찍한 재앙과 공포를 보여준다. 원전의 폭발, 폭발현장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리 도망가려는 군중들의 아비규환, 그 와중에 아이의 손을 놓쳐버린 엄마의 멘붕까지…. 모두 끔찍하다.

그러나 영화 ‘판도라’에서 가장 끔찍한 장면은 청와대 지하벙커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연출된다. 일견 합리적이고 냉철해 보이는 총리(이경영)는 ‘원전 사고지역 주민 1만5000명을 살리자고 5000만 국민들을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다’는 확신에 차 있다. 원전지역에서 살았다는 죄밖에 없는 1만5000명에게 대뜸 사형선고를 내리는 꼴이다.

▲ 자신의 안위에만 관심 있는 '비선실세' 총리는 국민을 더 큰 위험에 빠뜨린다.[사진=더스쿠프포토]
문득 하버드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들(MIchael Sandel) 교수가 이 장면을 접하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부질없이 궁금해진다. 샌들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 What is right thing to do?)」는 2010년 한국에서 번역 출간돼 무려 200만부라는 불가사의한 판매기록을 남겼다. 정작 미국에서는 10만부 남짓 팔린 책이 야박하기로 소문난 한국 독서시장에서 200만부 팔렸다는 것은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이 판매 기록의 분석 기사를 다룰 정도로 특이한 사건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00만부 판매신화의 원인을 정의와 공정성이 무너진 한국에서 한국민들의 ‘정의와 공정성에 대한 갈증’에서 찾았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독자들이 수준 높은 철학서에 열광했다는데도 왠지 뒷맛이 개운치 않다.

샌들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무척 무겁고 당혹스러운 질문 하나를 던진다. 제동장치가 고장 난 기차가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고 있다. 기차가 달리는 선로에 5명의 인부가 영문도 모른 채 작업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5명이 희생된다. 당신은 선로 변경장치를 작동해서 기차의 진행방향을 바꿀 수 있다. 선로를 바꿔 1명의 인부가 작업하고 있는 선로로 기차를 달리게 할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물론 샌들 교수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정답을 내놓지 않은 채 독자들에게 고민을 요구한다. ‘판도라’의 총리라면 당연히 1명을 희생시켜 5명을 구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선택이라고 대답할 듯하다. 관객들의 대답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1만5000명의 희생 위에 5000만 국민의 안전을 추구하는 것이 정의롭고 공정한 선택일까. 그것이 내게 닥친 실제 상황이라면 아마도 5000만 국민은 수긍할지 몰라도 지은 죄도 없이 영문도 모른 채 사형선고를 받은 1만5000명은 결코 그것이 정의롭고 공정한 판단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을 듯하다.

▲ 수많은 사람이 희생당한 대형 사고는 수많은 개별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사진=뉴시스]
마이클 샌들 교수의 현문賢問에 대한 현답賢答은 뜻밖에도 우리에게도 제법 알려진 일본의 코미디언 출신 배우이자 감독 기타노 다케시北野武에게서 찾을 수 있다. 기타노는 모든 것을 계량화하고 합리적인 판단과 대응만을 강조하는 후쿠시마 원전사고 대응방식과 특히 그 기억의 방식에 분개한다. 그는 “후쿠시마 원전사태는 2만명이 죽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한사람, 한사람이 죽은 2만개의 사건들로 기억해야한다”라고 주장한다. 2만명이 한꺼번에 죽은 하나의 사건에서 개개인들의 슬픔과 고통은 알려지지도 않고 기억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정의란 공정해야 한다. 공정하다는 것은 개개인을 단지 전체의 일부로 보거나 전체를 위해 희생도 가능한 존재로 보지 않고, 개개인을 존중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국가전체의 안전이나 국가경제를 위해 특정한 개개인의 희생을 강요한다면 그것을 공정하다고 할 수 없고 정의라고 할 수도 없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양자택일兩者擇一의 선택에서 정의와 현답을 찾는 우愚를 범하면서 거의 회복불능의 분노와 적개심으로 점철된 양극화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제에 대한 변화와 발전의 현답은 주어진 조건에 대한 기계적이고 난폭한 양자택일이 아니라 공정한 양자택이兩者擇二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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