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판도라 ❹

‘사회변동 이론(social change theory)’에는 아마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논쟁이 있다. 세상을 변화를 이끄는 ‘기관차(locomotive)’는 인간일까 아니면 구조일까. 만약 그것이 인간이라면 엘리트나 지도자일까 아니면 민중일까. 가장 근본적인 세계관과 역사관의 차이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영화 ‘판도라’가 보여주는 세계관은 다분히 ‘민중이론’에 가깝다. 원자력발전소라는 봉인이 막 해제되어 ‘산 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하게 되리라’는 지옥의 묵시록이 실현되려는 순간. 발전소 말단직원들이라는 이름 없는 민중들이 지옥문을 막아선다. 대통령이나 총리를 필두로 한 엘리트들은 지리멸렬支離滅裂한다.

사회변동이론의 ‘엘리트 결정론’을 비웃는다. 대통령(김명민)은 인간적이기는 한 듯하나 무능하고, 총리(이경영)는 다소 유능하고 합리적인 듯하지만 비인간적이다. 합리적이라는 말은 간혹 비인간적이라는 말과 동의어에 가깝다. 바야흐로 지옥문이 열리느냐 마느냐의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순간 무명의 민초들이 목숨을 던져 열리던 지옥문을 닫는 결정적인 변화의 ‘기관차’ 역할을 수행하는 장면은 자못 비장하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왠지 조금은 억울하고 부당하다.

▲ 절체절명의 순간에 죽음을 각오하고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것은 늘 민초들의 몫이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사람 사는 세상에 갈등의 종류도 다양하고 원인도 다양하지만 쉽사리 해결하기 어려운 갈등 중 하나는 노르웨이의 동물학자 쉘데루프 에베(Thorleif Schjelder up-Ebbe)가 명명한 ‘먹이 먹는 순서’를 둘러싼 갈등이다. 특히나 먹이가 부족할 경우 먹이 먹는 순서는 생사生死가 걸린 순서일 수밖에 없다. 동물의 세계나 인간의 세계나 먹이 먹는 순서는 쉽게 양보하거나 타협하기 어려운 문제이고 파괴적인 투쟁의 원천이 되곤 한다.

먹는 순서를 둘러싼 사생결단의 파괴적인 투쟁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키기 위한 장치로 고안된 것이 소위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의 구상이다. 위에 물이 고이면 넘쳐난 물이 아래로 떨어지듯, 얌전히 제자리에서 순서를 기다리면 언젠가는 내 순서도 돌아온다는 것이다. 각종 서양식 연회의 ‘샴페인 타워’는 낙수효과를 상징한다. 꼭대기 잔에 샴페인을 계속 부으면 종국에는 가장 아래 잔까지 채워진다.

한국 전통의 낙수효과는 상물림의 전통에서 구현된다. 상다리가 휘어지거나 아예 부러질 정도로 차려진 임금님 수라상의 음식은 모두 임금님만을 위해 올린 것이 아니다. 임금님이 먹고 난 음식은 신하들이 먹고, 신하들이 먹고 남은 음식은 ‘아랫것’들이 먹는다. 갈비찜이나 닭다리가 아랫것들에게까지 남아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계륵鷄肋이나마 가장 아래까지 음식이 낙수落水하도록 구상됐다.

그렇지 않으면 아랫것들이 임금님이나 대감님 밥상을 덮칠지도 모를 일이다. 낙수라는 자연의 법칙에 충실한 낙수효과만 제대로 작동한다면 계층사회의 모순과 극한투쟁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다. 독일의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Zimm el)의 해법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희생의 순서’와 ‘죽는 순서’다. 먹는 순서는 위에서 아래로 정해놓고, 죽는 순서는 아래에서 위로 거꾸로 정해진다. 갑자기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연어처럼 물살을 거슬러 올라간다.

▲ 컨트롤타워의 부재는 책임 없는 권한만 난무한 탓이다.[사진=뉴시스]
권한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지옥문이 열리면 누리는 권한이나 먹은 것도 변변치 못한 아랫것들에게 지옥문을 막는 책임이 돌아가곤 한다. 전쟁이 나면 아랫것들 순서대로 전쟁터로 나간다. 잘 먹고 많이 먹은 윗분들은 대개 난치병이나 희귀병에 시달려 군대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못 먹은 아랫것들은 대책 없이 건강하고 건장하다. 국가부도사태가 발생하면 아랫것들이 장롱 속 금가락지를 꺼내고 금니를 뽑는다. 대형금고에서 나온 목침만한 금괴는 없다. 영화 ‘판도라’에서도 녹아내리는 원자로 속으로 아랫것들이 들어간다. 먹는 순서에 낙수의 원칙을 적용한다면 죽는 순서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되는 것이 온당하다. 권한이 크면 책임도 그만큼 커야한다, 더 많은 것을 먼저 먹은 사람들이 희생도 더 많이 그리고 먼저 치르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다. 
김상회 육영교육문화 연구원장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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