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종말론과 패착

“집값이 오르고 금리도 높은 상황에서만 유지할 수 있는 특수한 거래형태.” 우리나라 전세제도를 설명하는 말이다. 한국 경제는 지금 저금리에 빠져있고 집값이 더 오를 여지도 없다. 그러니 전세는 줄어들어야 마땅하다. 정부도 ‘전세종말론’에 힘을 실었다. 그런데 최근 부동산 분위기는 다르다. 위축하는 듯하던 전세가 다시 날개를 펴고 있다. 왜일까.

▲ 많은 부동산 전무가들이 '전세 종말론'을 주장했지만 전세 거래량은 줄어들지 않았다.[사진=뉴시스]

“어차피 전세시대는 간다. 하나의 추억이 될 것이다.” 지난해 2월 국정과제 세미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전세 종말론’을 폈다. 박 대통령뿐만 아니다. 다수의 부동산 전문가들이 “이제 전세는 사라질 것”이라며 입을 모았다. 시장 원리로 보면 근거는 타당하다. 전세 제도를 지탱하는 힘이 ‘고금리’와 ‘부동산 광풍’이라서다.

전세가 우리나라 주거 임대차 시장을 지배할 때의 상황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집주인은 대출 문턱이 높은 은행을 이용할 필요가 없다. 세입자로부터 전세금을 받으면 된다. 이자도 없다. 고금리일 때는 이를 활용해 언제든 목돈을 더 불릴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 집값도 자연스레 오른다. 전세금을 바탕으로 다른 주택을 살 수도 있다. 그야말로 훌륭한 재테크 수단이다. 세입자도 손해를 볼 일은 없다. 전세금을 맡기고 돈을 모으면서 ‘내집마련’의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집값이 오르지 않고 저금리 시대에 돌입하면 이런 ‘윈윈 구조’가 성립하지 않는다. 저금리에 돈 굴릴 데가 없는 집주인은 전셋집을 월세로 돌리기 때문이다. 매달 나가는 월세가 아까운 세입자는 전셋집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칠 수밖에 없다.

이는 2015년 우리나라를 휩쓴 ‘전세 대란’의 원인이 됐다. 전세 물량의 씨가 마르면서 전세금이 폭등한 것이다. 전세금은 2009년 2월 이후 지난해 7월까지 354주 연속 올랐다. 2년 단위 재계약에서 1억원 이상을 요구하는 집주인을 보는 경우도 허다했다.

현대경제연구원이 폭등하는 전세금을 고령화, 일자리 감소, 양극화와 함께 경기침체 4대주범으로 꼽았던 이유다. 국제통화기금(IMF)도 전세문화가 우리 금융권의 위험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경고를 보냈다. 급등한 전세금이 떨어지면 담보로 맡겨진 집이 부실화할 수 있으니 전세를 월세로 바꿔 나가는 게 좋겠다는 훈수였다. 전세 종말론은 그렇게 현실이 되는 듯 했다. 앞으로도 금리나 집값이 크게 오를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부동산 통계를 보면 흐름이 이상하다. 전세 대신 늘어나야 마땅한 월세 거래가 잠잠하다. 올해 1월 전월세 거래량 중 월세가 차지하는 비중은 46.6%. 지난해 1월과 같은 수치다. 1년 사이 월세 비중이 앞서는 기간도 있었지만, 반대로 전세 비중이 치솟는 기간도 있었다. 극심한 전세 대란으로 몸살을 앓던 서울지역 아파트 월세 거래량도 지난해 1월 130건에서 올해 1월 96건으로 줄었다. 준월세와 준전세를 포함해 계산해도 지난해 1월 4734건에서 올해 1월 4599건으로 줄었다. 반면 전세 거래량은 2016년 1월 7841건에서 올해 1월 9123건으로 오히려 늘었다.

부동산 정책 덕에 ‘전세 부활’

전문가들은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를 두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이유는 ‘올해와 내년에 쏟아질 입주 물량’이다. 아파트 공급이 늘면서 자연스레 전세 물량이 증가했다. 다른 지역에 전세물건이 쌓이다보니 집주인들이 월세로 돌리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둘째 이유는 갭(gap) 투자다. 이는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이 높은 지역에 전세를 끼고 적은 돈으로 집을 구입한 뒤 다시 되팔아 시세차익을 노리는 투자 방식이다. 이 방식은 집값 상승기인 2015년에 몰렸다. 이때 계약서를 쓴 전세 아파트의 만기(2년)가 돌아오는 시점이 지금이다. 덕분에 전세 매물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다. 이들 두 원인의 끝에는 정부가 있다. 아파트 입주 물량이 몰린 것과 전세가율을 올린 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 이어진 ‘전세 시대’를 두고 서민들이 마냥 환호할 수 없다는 점이다. 집값 상승세는 꺾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데 비해 전세 가격은 여전히 오를 것으로 전망되면서 깡통전세(매매가가 전세금보다 싼 집)가 될 수 있어서다. 이렇게 되면 세입자는 피같은 전세금을 집주인으로부터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

전세가 위험하다면 소비자의 선택은 간단해진다. 집을 사거나 월세로 옮기거나 하면 된다. 문제는 선택의 여지없이 월세로 떠밀리는 서민들이다. 이들에게는 월세 전환이 대안이 될 수 없다. 월세 전환이 더 큰 부담이라서다.

김준형 명지대(부동산학) 교수는 이렇게 꼬집었다. “이미 폭등한 전세금이 전세에서 월세로 전환하는 물량의 임대료까지 덩달아 올린다. 전세금이 오르면 월세로 전환하는 가구가 늘어나고, 이 오른 가격을 기반으로 임대료를 산정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는 서민들에게는 과중한 주거비 부담을 얹을 수밖에 없다.”

집이 있거나 월세를 견딜 수 있는 중산층은 괜찮다. 하지만 일반 서민은 보호막 자체가 없는 상황이다. 정부는 임대료 일부를 지원하는 주택바우처제도, 월세 소득공제 확대, 월세대출 지원, 공공임대주택 확대 등의 실질적인 해결책을 외면했다. ‘주거비 부담 증가→내수 부진→경기회복 지연’의 악순환은 우리 경제를 오랫동안 갉아먹을 공산이 크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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