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인의 난, 우려 혹은 기우

79년 만에 오너가 구속됐다. 삼성그룹은 말 그대로 ‘패닉’이다. 황태자(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한명이 사라졌을 뿐인데, 난파선이 따로 없다. 재계 안팎에선 ‘외국인의 난亂’까지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오너가 힘을 잃은 사이, 외국인 투자자가 경영권을 위협할 거라는 얘기다. 설득력이 있는 우려일까.

▲ 전문가들은 '외국인 투자자'를 악한 자본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고 평가한다.[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경영권 위협’. 우리나라 재계가 가장 두려워하는 문장이다. 그만큼 대기업 오너에게 경영권은 소중하다. 배임ㆍ횡령 사건을 저지르거나 경영에 실패해도 경영권만은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기업 승계 방식과 상속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재계가 경영권에 매달리는 이유는 너무도 간단하다. 놓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기업 오너 대부분은 쥐꼬리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경영하고 있다. 그래서 경영권에 집착하는 오너에겐 사방이 적敵이다. 그중 외국인 투자자는 강적이다.

그런 외국인 투자자가 또다시 ‘화두’로 떠올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되면서다. 골자는 다음과 같다. “오너의 구속으로 경영권이 흔들릴 가능성이 높다. 삼성은 외국인 투자자의 놀이터가 될지 모른다.”

더 극단적인 우려도 있다. 재계 한 관계자의 말이다. “외국인에 경영권을 빼앗기는 건 ‘재앙 같은 일’이다. 외국인 투자자 중 경영권을 노리는 헤지펀드는 오직 ‘수익 창출’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기적 비용 절감을 위해 연구 개발비ㆍ광고 선전비를 삭감하고, 구조조정ㆍ명예퇴직을 통한 인건비 삭감도 시도한다. 결국 기업의 장기적 성장 잠재력이 저하된다.”

언뜻 보면 그럴싸하다. 삼성전자의 외국인 투자자 지분율(50.8%)이 오너 일가의 지분율(18.4%)보다 현저히 높아서다. 더구나 삼성은 지난해 삼성물산ㆍ제일모직 합병을 두고 글로벌 헤지펀드인 엘리엇의 공격을 받은 아픔까지 겪었으니, ‘외국인의 난亂’을 걱정할 법도 하다.

실제로 삼성전자는 최근 수년 새 배당 규모를 크게 확대했다. 2013년 2조1569억원 규모의 배당금은 지난해 3조8500억원으로 78.5%나 늘었다. 재계는 삼성전자의 배당 확대를 두고 한숨을 쉰다. “삼성전자는 과거부터 주주 배당에 돈을 쓰는 대신 과감한 선행 투자를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가뜩이나 시장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데, 투자를 줄여 경쟁력이 줄어들까 걱정이다.”

그런데, 이 걱정은 현실적일까. 우리나라 기업의 경영권을 쥐락펴락할 만큼 외국인 투자자의 ‘힘’이 강한 걸까. 기업이 배당을 늘리면 그만큼 투자를 줄여야 할까. 박영석 서강대(경영학) 교수의 말을 통해 첫 번째 질문부터 풀어보자. “외국인 투자자는 투자자의 국적이 외국에 있을 뿐이다. 서로 제각각의 국적과 성향을 갖고 있다. 수익을 극대화하고 회수를 전제로 투자가 이뤄진다는 점에서 국내 자본과 다를 게 없다. 외국인 투자자 압박에 기업이 배당을 늘렸다는 주장에 뚜렷한 인과관계는 없다. 반대로 배당이 높은 기업에 외국인 투자자가 집중적으로 투자한 것일 수도 있어서다.” 외국인 투자자의 정체성은 ‘재계의 적’이 아니라는 거다.

두번째 질문도 통계를 보면 답이 금세 나온다. 삼성전자의 시설투자 규모는 2010년 21조6000억원에서 지난해 25조5000억원으로 늘었다. 반면 현금보유액은 2012년 22조원에서 지난해 3분기 88조원으로 훌쩍 뛰었다. 막대한 현금을 챙기고도 ‘선제 투자’를 하지 않았다는 거다. 우리나라 기업의 과도한 현금 보유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배당을 이유로 ‘선제적 투자’를 할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잃는 이유다.

물론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면 재계의 우려가 들어맞을 가능성은 없지 않다. 국적도 성향도 다른 이들이 경영권을 위협하기 위해 뭉칠 수는 있어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들은 아무 때나 뭉치지 않았다. 기업이 ‘오너 리스크’에 노출된 때에만 투합投合했다. 지난해 엘리엇이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삼성이 합병 비율의 불공정성 논란 가능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소버린 사태도 재벌 총수의 회계부정 사건으로 주가가 크게 떨어지면서 빚어졌다.

홍성준 약탈경제반대행동 사무국장은 “오너에만 집중된 권력 구조는 반대로 오너를 빌미로 약점을 만들 수 있는 구조”라면서 “대기업이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이렇게 큰데도 여전히 기업들은 사익을 추구하다 ‘오너 리스크’에 휘말린다”고 꼬집었다.

정건화 한신대(경영학) 교수는 “외국인 투자 자본이 국내 자본을 보완하고 구조조정과 기업지배구조 개선 등에 기여한 역할이 부정될 수는 없다”면서 “해외연기금, 뮤추얼펀드 등 대다수 장기투자자는 지금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실 외국인 자본은 우리 증시 30%를 차지하는 주요 구성원이다. 장기자본을 공급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기술을 이전하는 데 기여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받는다. 박 교수는 “재계가 적으로 삼은 외국인 투자자는 그 속성이 단기 자본차익을 노리고 투자하는 일부 투기 세력들”이라면서 “외국인 투자자의 정의를 왜곡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외국인의 난을 일으킨 주범은 대부분 투기세력이었다. 2003년 사모펀드 소버린 자산운용은 SK 지분 14.99%를 단숨에 매집하고 SK와 경영권 분쟁을 벌였다. SK는 국내 소액주주들에게 애국심으로 호소해 소중한 경영권을 지켰다. 그사이 소버린은 8000여억원의 시세차익을 얻고 빠져나왔다. 2006년 KT&G의 경영권을 위협한 뒤 막대한 이익을 내고 철수한 아이칸-리히켄슈타인 펀드도 같은 사례다.

외국인 자본은 선인가 악인가

그럼에도 우리가 외국인 투자자에게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건 ‘약점’이 분명해서다. 우리나라 기업 대부분은 ‘황제식 오너경영’을 벗지 못했다. 위협이 닥쳤음에도 지배구조 개선작업에는 소홀했다. 경영 견제 장치인 이사회는 거수기로 전락했고 주주총회는 의례적 절차로만 남아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늘리고 노동조합 활동을 압박했다. 하도급 관계의 중소 하청업체를 수탈했다. 대신 ‘경영권 상속’에만 초점을 맞췄다. 이 부회장의 구속도 상속을 위한 ‘시스템을 넘어선 판단’이 시작점이었다. 외국인 투자자가 날을 세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거다. 난亂은 ‘부패의 땅’에서터진다. ‘오너 리스크’만 터지면 ‘외국인의 난’을 걱정하는 재계가 곱씹어봐야 하는 말이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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