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투자자만 문제인가

“탐욕스러운 해외 투기자본에 맞서 토종 기업을 보호해야 한다.” 때만 되면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재계의 주장이다. 그런데 국민들의 관점으로는 재벌도 탐욕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재벌은 우리가 지켜야 할 토종기업이고, 투기자본은 탐욕스러운 악당이라는 이분법부터 깨뜨려야 할 때다.

▲ 국내 기업이 해외 투기자본과 대결할 때마다 '우리 기업을 빼앗아가려는 악당'이란 구도가 형성된다.[사진=뉴시스]

“자산 순위 4위 재벌의 경영권을 통째로 가져가겠다니 믿기지 않았다.” 2003년 소버린 사태를 회상한 투자 전문가의 말이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미디어는 소버린 자산운용을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으로 표현했다. 소버린이 8000억원의 시세차익을 챙기고도 세금 한푼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야말로 ‘악당’이 됐다. 반면 SK는 외국인 악당과 표 대결을 벌여 경영권을 지켜낸 ‘영웅’으로 남았다.” 3년 뒤 벌어진 KT&G-아이칸 사태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외국인 투자자는 우리 경제의 건전성을 위협하는 적으로 묘사됐다.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이들의 투자 방식이 너무 냉혹했기 때문이다. 소버린과 아이칸은 투기자본인 헤지펀드다. 최종 목적은 ‘이익 추구’. 이 목적을 위해선 법률 규제도 교묘히 피한다. 적대적 인수ㆍ합병(M&A)과 같은 극단적인 수단도 서슴지 않는다. 국가 경제를 마비에 빠뜨린 적도 있다.

미국의 헤지펀드인 엘리엇은 2008년 아르헨티나 부실채권을 헐값에 매입한 뒤, 아르헨티나에 채권 원리금과 이자를 모두 갚으라면서 미국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대법원은 아르헨티나에 15억 달러를 갚으라고 판결했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돈을 갚지 못해 2014년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했다. 헤지펀드의 이름 뒤에 종종 ‘탐욕’이 따라붙는 이유다.

재계가 외국인 투자자를 우려하는 점도 이 지점이다. 투기자본이 단기 이익만 쫓다가 우리 경제 발전을 망칠 수 있다는 거다. 국민들은 재계의 주장에 호응했다. 결국 투기자본의 국내 적대적 M&A 시도는 모두 미수未遂에 그쳤다. 이 논리는 삼성그룹과 엘리엇의 싸움에서도 적용됐고 삼성그룹은 승리했다.

그렇다면 이제 되물을 차례다. “오너가 굳건히 지키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탐욕 없이 선한 경영을 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대답은 ‘No’다. 이들 역시 국가와 기업의 이익보다는 오너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때가 많았다. 탈세, 비정규직 고용 증가, 재하청 재재하청으로 이어지는 기업간 착취, 중소기업과 서민을 등치는 금융의 탐욕은 우리 경제의 고질병으로 남아있다.

탐욕의 아이콘 ‘재벌’

기업 오너들은 적은 지분으로 견제 없는 절대 권한을 행사하면서도 결과에 책임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 권한마저도 세습하고 있다. 주요 그룹들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벌어진 배임이나 대기업 계열사들의 일감몰아주기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대기업 오너가 여러 형태로 비자금을 조성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속 성장 시절에나 통용되던 “대기업이 살아야 우리 경제도 산다”는 명제는 이제 힘을 잃었다. 실제로 전자ㆍ자동차ㆍ조선ㆍ철강 산업의 원청기업과 협력업체 간 매출 격차는 확대되고 있다. 삼성전자 매출액이 1% 늘면 1차 협력사의 매출은 0.562% 늘었으나 2차는 0.07%, 3차 협력사는 0.005% 늘어났을 뿐이다. 경제 성장의 달콤한 과실을 대기업이 독차지했다는 거다. 홍운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동조관계가 크게 약화됐다”며 “대기업의 성장이 중소기업의 성장을 유발하는 선순환 효과를 주장하기 어려워졌다”고 꼬집었다.

 

이제 ‘재벌(영웅)-투기자본(악당)’의 구도는 성립하지 않는다. 냉정하게 보면, 재벌식 경영도 언제든 우리 경제를 위협하는 뇌관임에 틀림없다. 권오인 경실련 경제팀장은 “당시 소버린도 불법을 저지른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했던 것”이라며 “시세차익은 외국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투자자들도 챙겼다”고 꼬집었다. 그는 “이런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경영권 위협을 빌미로 용의 비늘이라도 건드린 것처럼 흥분하는 건 합리적이지 않다”고 덧붙였다.

투기자본의 공격에 맞서 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잃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황제 경영권을 고수하려는 재계의 의도가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조돈문 가톨릭대(사회학) 교수는 “토종 기업과 해외 투기자본의 대결 구도는 본질을 흐리는 일”이라면서 “오너 일가의 폐습과 전횡을 감시하고 국민과 국가경제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벌이든 투기자본이든 ‘탐욕’이 경제를 망친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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