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부동 정치학

▲ 갈등을 봉합하는 ‘통합’ 대신 서로를 이해하는 ‘화합’이 필요하다.[사진=뉴시스]
온 나라를 뒤흔들던 대통령 탄핵사태가 마침내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이라는 결정으로 마무리됐다. 탄핵의 찬반 여부를 떠나 모두에게 불행한 사태다. 하지만 하나의 끝은 또 다른 과정의 시작이듯, 대통령 탄핵사태의 마무리는 ‘촛불’이든 ‘태극기’이든 모두에게 또 다른 시작을 고민하게 한다.

탄핵심판을 앞두고 모두들 헌법재판소 최종결정에 대한 ‘승복’과 탄핵 이후 우리 사회의 ‘통합’을 주문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승복과 통합이라는 결론은 마치 만병통치약식 처방전 같아 ‘불로초不老草를 먹으면 영생을 누리고 신선이 될 것’이라는 도사道士나 방사方士의 처방처럼 공허하게 들린다.

현실세계에서 승복과 통합의 논리는 다분히 ‘제국주의적’이다. 권력과 다수의 횡포와 폭력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사회통합’ 주문 역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폭력성’이란 단지 물리적 폭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수의 가치와 입장에 대한 정신적ㆍ문화적 폭력도 분명 폭력이다.

우리가 말하는 통합이란 모든 ‘차이’를 지워버릴 때만 가능한 비현실적인 처방이다. 모든 국민이 이념과 계층과 세대의 ‘차이’를 지워버리고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한일전 국가대표 축구경기 때에나 가능하다.

자기중심적 ‘통합’ 욕구는 많으면 많을 경우 조급증을 유발한다. 또, 근본적인 갈등 해소가 어려워지면 갈등을 ‘봉합’하려 든다. 하지만 봉합은 질병의 근본치료 대신 진통제를 처방하는 것과 같아 오히려 병을 키울 뿐이다.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거나 불만을 일시적으로 잠재우려는 망국적 ‘포퓰리즘’이 여기에서 기원한다.

도사의 처방처럼 비현실적이고, 또 제국주의적 폭력의 발톱을 감추고 있는 ‘승복’과 ‘통합’이라는 처방보다는 ‘화합’을 고민해야 할 때다. 지울 수 없는 ‘차이’를 지워버리려는 무모하고 난폭한 노력을 할 게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함께하는 ‘화이부동和而不同’ 방법을 찾고, 학습하고, 익혀야 할 때란 얘기다.

통합이 아닌 화합을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쉽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다. ‘이해’는 영어로 ‘under-stand’라고 표기한다. 상대의 아래에 서는 일이며,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다. 분명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럴 때 비로소 상대를 ‘이해’할 수 있고 ‘화합’할 수 있다.

꽁꽁 싸맨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추운 광장에 나와 촛불 들고 탄핵을 외치는 사람들이나 태극기에 난데없어 보이는 성조기까지 들고 나와 탄핵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이나 애국심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해’란 상대방의 말과 행위의 ‘의미’를 헤아리고 천착穿鑿하는 일이다. 유모차와 성조기에 담긴 의미를 서로 헤아릴 일이다.

이제는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한목소리로 목청껏 부르는 ‘떼창(제창齊唱)’ 대신 서로 고유의 음색을 살려 다른 선율로 화성和聲을 이루는 ‘합창’의 시대로 가야 한다. 통합이 ‘떼창’이라면 화합은 ‘합창’이다. ‘떼창’은 속이 후련하기도 하고 아무나 할 수 있지만 결코 아름답지 않다. ‘합창’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고, 약속을 지켜야 하고, 자신을 억누르기도 해야 한다. 학습과 훈련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아름답다. 우리가 통합이 아닌 화합을 해야 하는 이유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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