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곡성 ❺

영화 ‘곡성’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카뮈(Albert Camus)의 소설 「이방인(L’etranger)」을 만난다. 우리 사회를 짓누르는 ‘제노포비아(zenophobia)’를 돌아보게도 된다. 제노포비아는 넓게는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배척과 두려움을 뜻하기도 하고, 좁게는 이방인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 마을 사람들은 일본에서 온 이방인을 의심하고 두려움을 느낀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곡성’의 중심에는 언제부터인지도 모르게 마을 산자락에 터 잡고 살고 있는 일본에서 ‘유입’된 이방인(쿠니무라 준)이 살고 있다. 마을 주민 어느 누구도 그 이방인이 일본인이라는 것 외에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전무하다. 언제부터 살고 있는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이름조차 모른다. 마을이 평온할 때 그의 존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의 투명인간에 가깝다. 그러나 마을에 해괴한 변고가 연달아 발생하면서부터 일본에서 온 이방인은 ‘문제적’ 존재로 전면에 부상한다.

당국은 멀쩡했던 사람들이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키고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변고의 원인이 ‘야생버섯중독’이라고 제법 그럴듯한 결론을 내려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웬만해선 당국의 발표라면 냉소적이거나 시큰둥하다.

대신 ‘누리꾼 수사대’와 같은 마을 주민들의 자생적인 ‘촉’은 곧바로 산자락 오두막의 수상한 이방인에 꽂힌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全無하면서도 그를 의심한다. 모르면 의심스럽고 모르는 것은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어둠은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렵다. 죽음은 그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두렵다.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서 온 이방인은 그 속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어둠’과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두렵기도 하다. 우리는 대개의 경우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부터 찾는다. 지독한 독감은 ‘홍콩 독감’이고 뇌염은 ‘일본 뇌염’이다. 모든 나쁜 것이나 재앙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 내부의 문제로 인정하지 않는다. 음란한 퇴폐 사우나는 난데없이 ‘터키탕’이라고 명명된다. 민망하고 야만적으로 때를 벗겨내는 때수건은 ‘이태리 타월’이다. 물론 터키에 터키탕 없고 이탈리아에 이태리 타월 없다.

그 명명의 기원은 천지창조만큼이나 베일에 싸여있다. 더욱이 ‘곡성’의 이방인은 다른 곳도 아닌 침략과 재앙의 상징인 일본산産 무당이다. 이미 제노포비아의 완벽한 조건을 구비했다. 더 생각해보고 알아볼 필요도 없다. 일본 무당은 좋은 무당일 리가 없다.

▲ 세계 곳곳에서 제노포비아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사진=뉴시스]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등장하는 뫼르소(Meursault)는 공연한 의심과 막연한 적개심에 사로잡혀 한 아랍인을 쏘아 죽인다. 뫼르소에게 그 아랍인은 ‘이방인’이다. 살인 동기에 대해 뫼르소는 ‘태양이 너무 눈부셔서…’라는 그 유명한 진술을 한다.

살인의 원인을 나의 문제가 아닌 외부의 문제로 돌린다. 뫼르소는 어머니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는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그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한다.

‘상식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판사들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다음날 여자친구와 질펀하게 놀았다는 뫼르소는 상식을 가진 ‘우리’가 아닌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돼야 할 ‘이방인’이다.

우리는 누군가 보이는 이상한 언행이나 사고방식, 혹은 가치관을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려는 소위 내재적 접근을 시도하지 않는다. 자신의 기준으로 배척하고 단죄할 뿐이다. ‘곡성’의 종구(곽도원)를 위시한 주민들은 이상한 외지인을 찾아가 차분히 그를 알아보려 하지 않는다. 떼로 몰려가 불문곡직 드잡이하고 둘러엎는다. 제노포비아가 폭발하고 영화는 파괴적인 비극으로 치닫는다.

카뮈의 뫼르소는 이상한 아랍인에게 막연한 적개심을 느껴 살해하고, 판사들은 어머니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는 뫼르소의 ‘이상함’에 사형선고를 내린다. 모두에게 이상한 것은 그만큼 두렵기도 하고 견디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는 나에게 이상하고, 나는 또다른 그에게 이상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 뫼르소일 수 있다. 나는 그의 이상함을 견딜 수 없고, 그는 나의 이상함을 참을 수 없다.

정치가 폭발하는 요즘 조금은 난데없이 선의善意 논쟁이 어지럽다. 한 유력한 대선 후보가 아무리 이상한 상대의 주장이라도 일단은 선의로 받아들이고 대화한다는 지론을 둘러싼 논란이다. 어쩌면 너무나 지당한 말씀이 논란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낯설고 생소한 이상한 것들은 모두 의심스럽고 두렵다. 의심스럽고 두려운 대상은 우선 제거하고 타도하고 싶을 뿐 선의로 해석하고 대화의 상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영화 ‘곡성’의 외지인의 비극이고 뫼르소의 비극이다. 우리 모두의 비극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