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영웅 ➍

장예모 감독은 영화 ‘영웅’에 ‘천하의 시작’이라는 부제副題를 붙인다. 천하의 시작이라는 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마치 ‘창세기創世記’처럼 들리기도 한다. 장예모 감독이 진시황제에 의해 ‘천하’가 시작됐음을 의미하는 부제라면 진시황제를 가히 ‘하느님’의 반열에 올려놓은 꼴이다. 이 시각은 과연 옳을까.

 
중국을 지칭하는 ‘차이나(China)’가 진秦제국의 출범에서 비롯됐다면 중국인들에게 진시황제는 거의 ‘하느님’급일지도 모르겠다. 혹시 2500년 전 진시황제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지금 수십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로 나누어진 재미있는 중국 대륙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유럽처럼 말이다.

누구나 마음 속에 자신의 ‘영웅’을 그린다. 악성 베토벤은 전제군주정치 타도의 챔피언 나폴레옹에게 헌정하기 위해 그의 교향곡 ‘영웅’을 작곡했지만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교향곡의 표지를 찢어버렸다고 한다.

장예모 감독이 영화 ‘영웅’에서 그리고자 했던 영웅은 누구인지 명확지는 않다. 중국 대륙 통일의 대업은 달성했지만 중국 최초의 황제의 자리에 올라 폭정을 일삼은 진시황제를 베토벤이 그랬듯  마음 속에서 지웠을지도 모른다. 그 대신 이상정치(Ideal Politics)를 꿈꾸고 자신들의 목숨을 버림으로써 진시황제의 천하통일 대업의 길을 열어준 무명(이연걸)이나 파검(양조위)을 영웅으로 그리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 파검과 무명이 꿈꿨던 '백성이 더 이상 피흘리지 않는' 이상정치는 결국 실패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의 마지막에 진시황제는 ‘10보 필살기’라는 신공을 완성한 자객 무명을 10보 앞에서 마주한다. 진시황제는 사형집행관이나 다름없는 무명에게 최후진술을 한다. “중국이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있으면 전쟁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한차례의 통일전쟁으로 더이상의 전쟁과 백성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눈 질끈 감고 다른 나라들을 무력으로 제압했노라.” 사형집행관 무명은 순간 마음이 흔들린다. 진시황제의 최후진술에 감동 받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진시황제를 살려두고자 했던 또다른 자객 파검의 논리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무명도 암살을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무명의 당부는 백성들의 피로써 천하를 얻었으니 이제 더이상 백성들이 피 흘리지 않는 이상정치를 펼쳐달라는 것이었다. 무명과 파검은 이상정치를 꿈꾸고 진시황제도 엄숙히 약속한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진시황제의 통치는 여전히 무력에 의존한다. 진시황제의 통치에 반발하는 수많은 세력을 칼로 제압한다. 이상정치는 이상일 뿐 힘을 기반으로 하는 현실정치(Power Politics)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힘없는 백성들은 여전히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며 동원의 대상일 뿐이다.

권력의 속성이 그러하다. 링컨 대통령은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려면 그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줘 보라’는 명언을 남겼다. 권력을 장악하고도 이상정치를 실현하기는 그만큼 어렵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마도 불가능한 기대일지도 모르겠다. 진시황제의 패권전쟁에 앞서 기원전 4세기에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놓고 펠로폰네소스(Peloponnessian War) 전쟁을 벌였다.

그 거대한 전쟁의 시말을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es)가 자세히 기록에 남겼다. 어느 진영에도 합류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려던 약소국 멜로스(Melos) 국왕에게 강대국 스파르타의 특사가 최후통첩을 날린다. “강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약자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해야만 한다. 그것이 정의다.” 현실정치의 속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문장으로 수천년 동안 전해진다.

▲ 사람은 그대로인데 제도만 바꾼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사진=뉴시스]
얼떨결에 맞이하게 된 조기대선을 앞두고 패권논쟁이 뜨겁다. 우리 정치의 만악萬惡의 근원이 패권으로 치환된다. 반反패권, 패권종식이 만병통치약처럼 선전된다. 반패권을 위한 온갖 합종연횡合從連衡의 구상이 어지럽다. 천사들의 합창처럼 지고지순하다.

반패권을 위한 개헌논쟁도 뜨겁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도는 사람이 만들고 제도가 사람을 만들지는 않는다. 제도가 바뀐다고 사람이 바뀌지 않는다. 어떠한 제도든 법이든 그것을 운영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고 제도만 바꾼다고 크게 달라질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서양의 고대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동양의 고대 전국戰國시대 이래 제도는 헤아릴 수 없이 요동쳐왔지만 권력과 사람의 속성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당연히 정치의 모습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안타깝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크게 달라질 것이란 기대도 난망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무명이나 파검과 같이 이상정치를 꿈꾸는 ‘영웅’을 대망한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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