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길의 비극

시민들이 경의선 옆 국유지에 장터를 만들었다. 그 장터는 ‘도심 속 명물’로 이름을 떨쳤다. 그런데 이게 웬걸. 국유지의 소유자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이 땅을 이랜드에 팔았다. 임대료 등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였는데, 시민들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 공덕역 인근 부지에서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사진=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 제공]

도심 한복판에 싱그러운 녹음이 길게 이어진 길이 있다. 제법 유명세를 탄 ‘경의선 숲길’이다. 고층 건물로 빽빽한 서울 중심가에 놓인 공원은 시민들의 가슴을 뻥 뚫기에 충분했다. 이런 공원이 생기는 데는 땅의 소유주인 한국철도시설공단의 역할이 컸다. 철도공단은 경의선 일부 구간을 지하에 매설하는 작업에 들어서자 2010년 서울시에 지상길을 빌려줬다. 시는 이 부지에 공원을 꾸몄다. 소음과 흙먼지로 시민을 괴롭히던 철길을 시민에게 돌려주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2015년 말 좋은 취지가 무색해지는 일이 발생했다. 숲길 한가운데 있던 생기 넘치는 시장이 문을 닫으면서다. 2013년 공덕역 인근에 문을 연 ‘늘장’이란 이름의 장터에선 그림책도서관, 영화도서관, 타로상담소를 갖추고 작가들이 만든 수공예품 등을 팔았다.

 

주말에는 지역 주민들이 크고 작은 중고 물품을 들고 나와 벼룩시장을 열었다. 다양한 공연이나 워크숍, 체험행사 등도 개최됐다. 시민들의 힘으로 만든 문화 장터였다. 입소문을 탄 늘장은 주말마다 수백명의 손님으로 북적였다. 늘장은 ‘언제나 열리는 시장’이라는 뜻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름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이유는 이렇다. 철도공단은 경의선 부지를 시에 공짜로 내준 게 아니었다.

2010년 두 기관이 맺은 협약서를 보자. 공단의 역할은 ‘서울시의 경의선 지상부지 공원 조성에 부지를 빌려주는 것’이었다. 그 조건으로 시는 ‘공단의 역세권 개발과 관련한 인허가 등에 협조’하기로 했다. 철도공단은 역세권 일부 부지는 공원 부지로 넘기지 않았다. 늘장이 둥지를 틀게 된 공덕역 인근의 땅도 마찬가지였다. 철도공단은 이 부지를 두고 2011년 이랜드와 계약을 맺었다. 이랜드가 건물을 지으면 30년간 부지를 임대해주는 방식이다. 인허가 과정을 거치고 착공에 들어서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사라진 시민들의 장터

마포구는 그 기간에 땅을 흉물처럼 방치하는 것이 마뜩지 않았다. 마침 지역주민과 시민단체 일부가 ‘늘장협동조합’을 꾸려 구청 측에 벼룩시장을 운영하겠다고 제안했다. 마포구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늘장은 문을 열었다. 2015년 말 허가가 끝나면서 함께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아직 시장은 폐허가 되지 않았다. 대신 ‘경의선 광장’이라는 새로운 공간이 열렸다. 이 공간을 주도하는 건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 이들은 늘장의 성공에서 영감을 얻었다. 방치된 국유지도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봤다. 도시개발 전문가들과 시민단체가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 이들을 중심으로 건물주에게 쫓겨난 임차인부터, 하루 아침에 일터를 잃은 노점상, 재개발로 쫓겨난 세입자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그리고 개발을 앞두고 있는 땅에 서서 물었다. “국유지의 공공가치를 회복하기 위한 다른 대안은 없는가. 기업이 일방적으로 국유지의 공공가치를 갖는 방식에 문제는 없는가.”

법으로 따지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철도공단의 논리도 명확하다. 당시 공단이 낸 보도자료를 보자. “매년 점용료 수익 약 20억원을 창출하고 철도부지 개발을 통해 커뮤니티 공간을 제공해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지역 발전에도 기여할 것.” 국유지를 기업에 빌려주면 공단은 임대료 수익을 얻을 수 있다. 세금을 들이지 않고 해당 지역을 개발할 수도 있다. 기업이 얻을 게 더 많기 때문이다. 공덕역은 4개 노선(5ㆍ6호선ㆍ경의중앙ㆍ공항철도)을 합친 역세권에다가 신안산선까지 들어올 예정이다. 기업이 건물을 지으면 사람이 몰릴 건 자명하다. 이랜드가 이 부지에 건물을 짓겠다고 나선 이유다.

 

그런데 따져봐야 할 게 있다. 경의선은 국민의 세금으로 만들어졌다. 경의선숲길이 탄생한 계기가 된 ‘경의선 지하화’ 작업도 국민의 세금이 투입됐다. 공원 조성도 마찬가지다. 이 대가를 누리는 건 엉뚱하게도 이랜드다. 문을 닫은 시장에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이 남아있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김성은 경의선공유지시민행동 활동가는 “철도공사는 임대 이유로 재정이 부족하다는 점을 든다”면서 “국민들의 가치가 포함된 땅을 민간기업에 넘기는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시민 문화 공간 확보가 먼저

이런 방식으로 경의선 부지 5곳이 개발 중이다. 각 기업은 저마다 부지 개발의 청사진을 발표했다. 큰 빌딩이 들어서고 그 안은 관광호텔과 오피스텔, 쇼핑몰 등 우리가 도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콘텐트로 채워졌다.

공원 부지가 10만1668㎡(약 3만700평)인데, 역세권 개발 부지 면적이 9만3956㎡(약 2만8000평)으로 절반에 달한다. 이래서는 철길로 100년 가까이 고통을 겪은 시민들의 희생을 보상하겠다는 취지와도 맞지도 않는다. 기업 자본이 들어선 주요 역세권을 기점으로 공원이 뻗어나가는 형태라서다. 개발의 과실을 따는 건 기업과 주변 부동산을 보유한 극소수의 사람뿐이다.

민간 개발 과정은 인근 지역의 시민들과 전문가들의 참여도 배제된다. 윤철한 경실련 시민권익센터 국장은 “터전이 바뀐 주민들은 정작 개발로 되돌려 받는 게 거의 없다”면서 “살고 있는 지역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의사결정 과정에도 참여하지 못 한다는 게 문제”라고 꼬집었다. 공유지가 공공성을 가져야 한다는 공감대가 필요한 시점이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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