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영웅 ➎

감독들은 영화 막바지에 반전을 숨겨둔다. 반전은 영화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휘몰아 간다. ‘영웅’도 예외가 아니다. 진시황제 영정嬴政의 암살에 모든 것을 걸었던 파검(양조위)은 영화 막바지에 이르러 햄릿(Hamlet)과 같은 고뇌에 빠진다. ‘죽느냐 사느냐’의 고민이 이니라 ‘영정을 죽일 것인가 살려둘 것인가’의 문제다.

 
햄릿의 고민이 다분히 개인적인 것이라면 파검의 고뇌는 ‘천하’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다. 파검은 햄릿보다 더 혹독한 고뇌 끝에 진시황제를 살려두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진시황제의 암살에 함께 일생을 걸었던 동지이자 연인인 비설(장만옥)에게 자신의 깨달음과 변심을 설명하고 설득하기는 실로 난망한 일이다. 일방적인 선언 또한 어려운 일임에 분명하다.

파검은 소심한 소년의 사랑고백처럼 모랫바닥에 칼로 ‘천하天下’라는 두 글자를 써서 비설에게 보여준다. 천하는 국가와 세상을 상징한다. 이제 세상의 끝없는 전쟁을 마무리짓고 안정을 이룰 수 있는 인물은 진왕 영정밖에 없으니, 세상의 평화를 위해 원한을 덮어두고 그를 살려두는 것이 세상을 위하는 길이라는 진술인 셈이다. 진시황제의 무력에 짓밟힌 망국 조나라 장군의 딸인 한많은 비설에게 파검의 논리는 변절자의 헛소리에 불과하다.

비설이라는 이름 그대로 여인이 한을 품으면 서리가 내린다. 비설의 칼이 서리처럼 ‘변절자’ 파검에게 꽂힌다. 파검은 이름 그대로 검을 버리고 비설의 칼에 죽음을 맞는다. 파검의 연인 비설은 햄릿의 연인 오필리아(Ophelia)와는 다르다.

▲ 비설에게 '영정 암살'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포기한 파검은 변절자일 뿐이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소위 ‘10보 필살기’를 완성해 진시황제 암살의 ‘대표선수’로 최종 선발된 무명(이연걸)도 막상 진시황제 면전 10보까지 접근한 순간 파검이 써서 보여준 ‘천하’라는 두 글자가 떠오르며 결행을 망설인다. 무명은 ‘타깃’ 진시황제를 목전에 두고 햄릿의 고민에 빠진다. 햄릿이 고뇌 끝에 자살을 포기하듯 무명은 암살을 포기하고 진왕 영정에게 파검의 ‘천하론’을 전한다. 파검의 천하론은 군주를 향한 백성의 비원悲願이기도 하다.

드넓은 궁전을 살기殺氣로 가득 채운 채 자객 무명과 나누는 짧은 대화 속에서 마키아벨리적 군주론으로 무장했던 정복왕 영정은 중국 고대 병법서 무경칠서武經七書 중 하나인 육도삼략六韜三略의 군주론에 담긴 지혜를 깨우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권력을 위한 군주론이라면 육도삼략의 군주론은 백성을 위한 군주론이다. 16세기 사분오열된 난세 이탈리아의 경세가輕世家 마키아벨리는 그의 유명한 군주론(君主論ㆍIl Principe)’에서 현실적인 권력의 정치공학을 설파한다.

“군주된 자는, 특히 새롭게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자는, 미덕美德을 모두 지켜가며 나라를 지키는 게 어렵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나라를 지키려면 때로는 배신을 해야 하고, 때로는 잔인해져야 한다. 인간성을 포기해야 할 때도, 신앙심조차 잠시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는 운명과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맞게 적절히 달라지는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가능하다면 선한 군주가 되어라. 그러나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사악해져라.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일이다. 일단 그렇게만 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든 칭송 받게 되며, 위대한 군주로 추앙 받게 된다.” 요약하자면 마키아벨리는 ‘더 큰 도덕을 위한 부도덕’을 말한다. 평화를 위한 통일전쟁이라는 진왕 영정의 논리다. 우리 사회에 뿌리깊은 ‘박정희 추앙사상’의 논리이기도 하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군주를 위한 현실정치를 말한다면, 무경칠서武經七書의 육도六韜는 백성을 위한 이상적인 군주론을 말한다. 파검과 무명이 영정에게 유언처럼 전한 ‘천하’가 육도의 핵심 키워드다.

▲ '더 큰 도덕을 위한 부도덕'이라는 논리는 합리적이지 않다.[사진=뉴시스]
“천하를 이롭게 하는 자는 천하가 길을 열어주며 환영하고, 천하를 해치는 자는 천하가 길을 막으며 저항한다. 천하는 군주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며 천하 만민의 천하다(비일인지천하 내천하지천하非一人之天下 乃天下之天下). 천하를 취하는 것은 들에 있는 사슴을 쫓는 것과 같다. 천하 만민 모두 그 고기를 나누어 받기를 원한다. 천하를 얻는 것은 함께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함께 강을 건너면 모두 그 이익을 나눌 수 있지만 배가 좌초되면 모두 그 해를 입는다. 이처럼 천하 사람과 이해를 같이하면 천하 사람이 모두 길을 열어주며 환영하고 결코 길을 막으며 저항하는 일이 없다.”

2017년 난세의 대한민국에 마키아벨리와 같은 무수한 경세가들이 저마다의 주군들에게 ‘더 큰 도덕을 실현하기 위한 부도덕’의 책략을 바친다. 온갖 배신과 사악함, 말바꾸기와 거짓도 불사한다. 파검과 무명은 마키아벨리적 정치공학으로 바야흐로 천하의 권력을 장악한 영정에게 이제는 자신의 권력이 아닌 천하 만민을 살피는 성군이 돼줄 것을 죽음으로 탄원한다. 난세 대한민국을 헤쳐나갈 새로운 지도자를 기다리는 국민들의 마음이 무명이나 파검의 비원悲願과 다르지 않을 듯하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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