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영웅 ➏

 
진시황제 암살이 필생의 목표인 자객 무명은 영정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던 3대 자객을 제거해준 공로를 인정받아 마침내 영정을 독대한다. 하지만 천하통일을 목전에 둔 영정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다. 무명이 세 명의 자객을 차단했다는 증거물로 장천과 파검, 비설의 창과 검을 바치지만, 영명英明한 영정은 뭔가 개운치 않다.

장천과 파검, 그리고 비설이 죽었다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단순히 ‘사실(fact)’일 뿐이다. ‘사실’이란 드러난 하나의 결과물이다. 결과가 과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다른 원인들이 같은 결과를 만들 수 있고, 같은 원인들이 다른 결과를 낳기도 한다.

▲ 영정은 무명이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하나의 결과는 의도하지 않은 산물일 수도 있다.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로 귀결되기도 하고, 나쁜 의도가 의도치 않은 좋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 영정은 ‘사실’에 만족하지 않고 장천과 파검, 비설의 죽음의 ‘진실(truth)’을 알고자 무명을 심문審問한다.

‘사실’과 ‘진실’은 하나의 빙산과 같다. ‘사실’은 수면 위로 보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반면 ‘진실’은 수면 아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부분이다. 노련한 수사관과 같은 영정의 심문이 진행되면서 ‘진실’은 어지럽게 변주된다.

파검이 연인 비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비설이 파검을 죽인 ‘진실’은 여인의 질투일 수도 있고 노선투쟁일 수도 있다. 장천이 무명과의 결투에서 죽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죽음의 진실은 대의를 위한 장천의 희생일 수도 있고 단순한 패배일 수도 있다. 사실의 실체적 진실에 따라 사실의 의미는 달라진다. ‘사실’은 객관적이지만 ‘진실’은 ‘사실’에 대한 주관적인 해석일 수 있다. 무명이 진왕 영정에게 밝힌 ‘진실’ 역시 무명의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

‘영웅’은 일본이 배출한 세계적인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ㆍ澤明 감독의 대표작 ‘라쇼몽羅生門’과 같은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라쇼몽에 등장하는 사무라이는 아내와 함께 어느 숲속을 지난다. 그 길에서 산적을 만나 아내는 겁탈당하고 사무라이는 죽임을 당한다. 살인사건이라는 ‘사실’ 자체는 단순하고 명백하다. 그러나 관아에 끌려온 산적과 사무라이의 아내 그리고 목격자 나무꾼이 진술하는 사건의 ‘진실’은 서로 다르다. 서로가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엇갈리는 진술에는 각자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개입된다. 편견과 고정관념도 뒤섞여 진실은 오리무중이다.

▲ '국정농단 사태'를 두고 진실공방이 벌어지고 있다.[사진=뉴시스]
그런 면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 서사에 담겨있는 고대 그리스인의 지혜와 통찰력은 놀랍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진실의 여신 ‘베리타스(veritas)’가 등장한다. 진리와 진실의 여신 베리타스는 흰 옷을 입고 이 세상 가장 깊은 우물 속에 숨어있다. 분명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베리타스를 본 사람은 없다. 진실도 마찬가지다.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인간이 알 수는 없다. 어쩌면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나 환상일지도 모른다.

소위 ‘국정농단 사태’의 수사를 통해 사건의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진실을 가리려 한다. 밝혀진 하나의 ‘사실’을 두고 서로 다른 ‘진실’들이 쏟아진다. 몇백억원의 금전이 석연치 않게 오고간 ‘사실’을 두고 ‘뇌물수수’라는 진실과 ‘공익추구’라는 상반된 진실이 부딪친다. 조만간 판사들이 하나의 진실의 손을 들어주겠지만, 지금 공인받은 진실이라고 해도 영구적인 것은 아니다. 진실은 끊임없이 변화하기도 한다.

5ㆍ16이라는 역사적 ‘사실’의 ‘진실’이 ‘군사쿠데타’가 되기도 하고 ‘구국의 결단’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진실’은 시류에 편승하기도 한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며, 강자에게 유익한 것으로 귀결된다”고 했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가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의 통찰력이 옳다면 진실 역시 강자의 이익이며, 강자에게 유익한 것으로 귀결될지도 모르겠다. 다만 진실이 소수의 권력자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상식적인 시민들에게 유익한 것으로 귀결되는 세상이기를 소망한다. 상식적인 시민들이 ‘강자’로 자리를 잡는 세상을 꿈꾼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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