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치 원한다면…

▲ 격정의 투사와 같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넘어야 문재인 대통령이 성공할 수 있다.[사진=뉴시스]
‘나는 부정한다’라는 영화 제목은 중의적인 표현이다. 영화의 내용 그대로 아우슈비츠 학살에 대한 ‘부정’의 뜻과 함께 진실 왜곡에 맞서기 위한 법정공방에서 흥분을 배척한다는 의미에서 ‘부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1996년부터 4년간 영국 법정에서 벌어진 세기의 재판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를 보고 솔직히 두번 놀랐다. 유대인을 대량학살한 홀로코스트는 수많은 생존자의 증언이 존재하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재판의 대상이 될까라는 게 첫번째 놀란 점이다. 두번째는 모두가 진실이라고 믿는 사실이라도 억지를 쓰는 상대방을 설득하려면 격정과 분노보다 치밀한 논리와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데이비드 어빙은 유대인 역사학자 데보라 립스타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피고소인은 고소인의 거짓을 밝히기 위해 홀로코스트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어이없는 재판이었지만 변호인단은 고소인이 히틀러의 명령서를 번역할 때 왜곡한 대목을 찾아내고, 이것이 단순 실수가 아니라 고의적으로 조작됐다는 것을 집요하게 파헤친다.

피고소인은 이 분야에서 가장 정통한 학자이지만 법정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흥분하면 여론의 주목을 끌 수 있지만 재판에선 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변호인은 감정에 흔들릴 수 있다며 변론 중 원고의 눈을 애써 외면했다.

억지주장을 하는 데이비드 어빙 같은 인물은 어디에나 있다. 일본군 위안부가 없었다고 발뺌하거나, 광주 민주화운동을 왜곡하거나, 박근혜 전 대통령이 공권력으로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고 오리발을 내미는 등 적반하장賊反荷杖 태도는 끊임이 없다.

소송에서 진 데이비드 어빙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견해를 수정할까. 천만에. 그는 반유대주의 연구자를 넘어서 반유대주의자 그 자체가 됐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자신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폭력 진압과는 아무 관련이 없고 자신도 피해자라고 강변한 점을 보면 사람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참여정부는 절반의 성공도 못했다. 지금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실패와 좌절의 기억”이라고 참담하게 토로했다. 그의 측근들은 친일 부패 기득권 세력이 사사건건 참여정부의 발목을 잡아 노무현을 실패한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노무현은 격정과 분노의 투사였다.

그러나 명분과 이념의 정치지도자에 머물렀을 뿐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실용적인 리더십에는 한계를 보였다. 한미 FTA나 이라크 파병 등 역사에 남긴 그의 치적은 공교롭게도 지지자들의 뜻을 배신한 ‘고독한’ 결단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의 눈앞에는 가시밭길이 놓여있다. 그가 상대해야 할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주석, 아베 일본 총리,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스트롱맨으로 꼽힌다. 핵을 손에 쥔 북한의 지도자 김정은은 예측 불가능한 문제아 중 문제아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득표율은 41%, 여당 의석수는 120석에 불과하니 야당을 설득하지 못하면 단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문제는 적폐청산의 대상인 상대방의 협조를 받아야 국정을 꾸릴 수 있다는 딜레마다. 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은 높지만 자칫 야당의 비토크라시(거부정치)만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개혁과 통합은 함께 가야 성공한다. 개혁 없는 통합은 의미가 없고 통합이 없는 개혁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주변국의 강한 리더들을 상대하고, 국내의 반대자들을 설득하려면 영화 ‘나는 부정한다’ 변호인처럼 냉철한 지혜와 치밀한 협상력이 요구된다. 뜨거운 가슴보다 철저한 논리와 상대방을 배려하는 따뜻한 감성으로 벽을 넘어야 한다. 수구세력은 데이비드 어빙처럼 회개하지도 않고, 변화에 동참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국익을 위해서라면 ‘더러운 손’이라도 잡아야 한다. 정권교체 때마다 벌어지는 정치보복의 유혹에서 벗어나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통치자는 스스로를 욕보이더라도, 국민들은 깨끗하고 명예롭게 살도록 해주는 존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버지를 극복하지 못하고 박정희 시대의 권위주의적인 대통령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실패했다. 문 대통령의 성패는 친구이자 대통령 선배인 노무현을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달렸다. 문 대통령이 가야 할 길은 피끓는 투사가 아니라 냉철한 협상가이자 국가 CEO다. 어떤 명분이나 이념이라도 부국강병이나 국민행복에 앞서지 못한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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