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매트릭스(Matrix) ❸

프랑스 철학자 쟝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21세기에 이른 세계가 ‘진짜 같은 가짜의 세계’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의 세계’인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세계’로 달려가고 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중국 고대 사상가 장주莊周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몰랐을 2500년 전, 이미 시뮬라시옹의 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던 듯하다.

 
장주는 ‘장자莊子’의 ‘제물론편齊物論篇’에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는 잠꼬대 같은 이야기를 남긴다. 어느날 장주는 제자들을 불러 자신이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내가 지난 밤 꿈에 나비가 됐다. 날개를 펄럭이며 꽃 사이를 즐겁게 날아다녔는데 너무 즐거워서 내가 나인지도 몰랐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보니 내가 나비가 아니고 내가 아닌가? 그래서 생각해보니, 조금 전 꿈에서 나비가 됐을 때는 내가 나인지도 몰랐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분명 나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정말 나인가? 아니면 나비가 꿈에서 내가 된 것인가? 내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지금 나는 정말 나인가? 아니면 나비의 꿈속의 나인가?”

듣기만 해도 어지럽다. 짜증이 날 정도로 어지럽다. 이쯤 되면 장자의 제자는 극한직업에 가까웠을 듯하다. 장자의 잠꼬대 같은 ‘호접몽’처럼 나 역시 지금 내가 아는 나 아닌 누군가의 꿈속에 들어가 있는 나를 정말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내가 꾸고 있는 꿈은 내 꿈이 아니라 남이 나에게 꾸도록 프로그래밍해 놓은 꿈일지도 모른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뉴욕의 맨해튼쯤으로 보이는 번화한 시내를 수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오간다. 모두들 무표정하고 기계적이다. 우리도 그들처럼 하나의 거대한 매트릭스 속에 빠져 바쁘게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의 역사와 문화에 의해 설계되고 구조화된 매트릭스일 수도 있고, 권력과 자본의 매트릭스일 수도 있겠다.

▲ 가상 공간에서 네오와 트리니티는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사진=더스쿠프포토]
트릭스의 설계자는 문화 권력일 수도 있고 자본권력이나 정치권력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매트릭스 속에서 프로그래밍된 대로 사고하고 욕망하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움직인다. 내가 지금 꿈꾸고 욕망하는 모든 것이 정말 나의 꿈일까? 아니면 어느 권력이 나로 하여금 그 꿈을 꾸도록 설계해 놓은 것은 아닐까? 내가 그의 꿈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닐까?

모피어스와 네오, 그리고 트리니티가 매트릭스 프로그램에 접속해 꿈 속에 빠져 방문하는 매트릭스의 세계에 들어가면 그들은 번듯한 시내를 멋진 패션으로 활보한다. 가상의 공간 속에서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공중부양이나 이소룡의 초절정 무공쯤은 프로그램 기본 사양이다.

스파이더맨처럼 빌딩 사이를 날아다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접속을 끊고 돌아오는 현실세계에서 그들은 음습한 지하공간에서 넝마와 같은 옷을 걸친 거지꼴의 무기력하고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그들은 매트릭스 프로그램에 접속해 꿈과 현실 사이를 오간다. 어느 것이 그들의 현실인지 관객들도 본인들도 헷갈린다. 차이나칼라의 검은 롱코트와 검은 ‘라이방’의 네오가 정말 네오인지, 까까머리의 땟국물 흐르는 목 늘어난 ‘난닝구’ 차림의 네오가 정말 네오인지 헷갈린다.

워쇼스키 감독이 보여주는 현실세계와 가상세계를 넘나드는 여행법은 무척 흥미롭다. 어쩌면 워쇼스키 감독이 21세기 가상세계 여행자들에게 경고하는 ‘주의사항’인지도 모르겠다. 모피어스 일행은 이웃집 드나들 듯 현실과 가상세계를 넘나들지만 그들에게도 위험은 상존한다.

그들이 가상세계로 들어갈 때 현실세계에는 육신의 껍질만 남기고 영혼은 가상세계로 빨려 들어간다. 그들의 영혼이 가상세계 외출 중에 누군가 프로그램 접속을 끊어버리면 외출했던 영혼은 현실세계로 돌아오지 못하고 현실의 육신은 죽음을 맞게 된다.

▲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인터넷 상 가상세계와 현실세계를 오가는 여행자다.[사진=뉴시스]
또한 가상세계인 매트릭스의 공간으로 떠나는 것은 간단하지만, 현실세계로 돌아오는 길은 간단치 않다. 이미 서울 시내에서도 찾아보기 어렵게 된 유선전화나 유선공중전화 박스를 찾아야만 한다. 실체가 있는 현실로 돌아오는 통로는 실체가 존재하는 유선전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가상의 세계 매트릭스에서 보안요원들에게 쫓기고 궁지에 몰린 모피어스 일행이 위험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유일한 방법은 현실세계에서 발신해주는 유선전화를 통하는 방법뿐이다. 매트릭스 세계에 들어간 그들을 누군가 현실에서 호출해주지 않으면 매트릭스 세계의 미아가 되어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21세기를 사는 우리 모두 가상세계의 여행자들이 됐다. 장자의 호접몽의 세계처럼 꿈과 현실이 분간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간다. 워쇼스키 감독이 ‘매트릭스’에서 제시하는 ‘가상세계 여행자 주의사항’을 숙지熟知해 두는 것도 좋을 듯하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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