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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사진관] 키다리아저씨의 꿈 “별이 된 얘들아 이젠 지켜줄게”김치 파는 사회적기업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의 조인검 단장
[243호] 2017년 06월 13일 (화) 07:09:24
이윤찬 기자 chan4877@thescoop.co.kr


만성 신부전증 환자, 백혈병 환우…. 아픈 이들과 아프게 ‘동행同行’했다. 동고동락해야 약자들의 아픔을 나눌 수 있을 거라 여겼다. 매운 좌절을 맛봤고, 뼈아픈 눈물을 흘렸다. 시린 이별도 경험했다. “별이 되고 싶다”며 눈을 감은 백혈병 환우 앞에선 펑펑 울기도 했다.

이른바 ‘아픈 동행’, 난제難題가 숱했다. 넉넉지 않은 재정은 현실적인 벽이었다. 사회적기업가인 그가 난데없이 김치사업을 펼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스로 벌어 제대로 돕겠다”는 취지에서다. 사회적기업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 조인검(49) 단장의 ‘아픈 동행기記’를 취재했다. 더스쿠프(The SCOOP)-천막사진관의 여섯번째 주인공이다.

# 1장. 무뚝뚝한 할머니의 유언

냉기를 실은 바람이 유난히 매서웠던 2007년 12월. 그날도 그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설핏 잠이 들만 하면 이내 눈이 떠졌다. ‘만성 신부전증’으로 끙끙 앓다가 며칠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라 잠을 잘 수 없었다. 바늘에 찔려도 피 한방울 안 날 것 같은 할머니였다. 무뚝뚝했고, 얼음장 같았다.

그랬던 할머니가 그에게 묘한 말을 남긴 건 ‘유명을 달리 하신 날’ 즈음, 짬뽕을 점심으로 드실 때였다. “자네 참 괜찮은 젊은이야. 오늘 짬뽕 정말 맛있었네.” 그는 수줍게 농弄으로 답했다. “할매! 왜 그러는시는데요? 평생 안 하던 칭찬을 다 하시고요. 오늘도 편히 주무세요.”

세상 참 얄궂다. 몇년만에 그가 들은 간지러운 칭찬이 무뚝뚝한 할머니의 ‘유언遺言’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는 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서 머리를 파묻은 채 흐느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벌써 몇명째란 말인가. 죽음이 두렵다.” 사회적기업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의 조인검 단장은 그렇게 슬픔을 곱씹고 있었다.

▲ 조인검 단장은 취약계층에 밑반찬을 제공하는 ‘푸드뱅크’를 운영한다. 단순히 밑반찬만 전달하는 게 아니다. 마음도 함께 배달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 조인검 단장과 할머니들과의 인연은 벌써 10년이 넘었다. 경로당을 나서며 조 단장은 이렇게 인사했다. “할매 또 올게.” 친구처럼 정겹다. [사진=오상민 작가]

# 2장. 아픈 동행 슬픈 동행

독해도 그리 독할 수 없었다. 조금만 방심해도 운명이 달라졌다. 2007년 12월 조 단장은 삶의 끝자락에 서있는 ‘만성 신부전증’ 환자들과 ‘동행同行’을 하고 있었다. 그가 다니던 복지단체가 ‘신부전증 장애인 복지시설’을 도운 게 첫 인연이었는데, 동행은 자그만치 8년간(2000~2007년) 이어졌다.

딱히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그는 환자들과 ‘동고동락’했다. 한 공간에서 아픔을 나누고 희망을 쌓는 것, 그가 생각하는 ‘참된 헌신’이었다. 때만 되면 ‘착한 척’하면서 나타나 ‘돕는 척’ 하고 싶지 않았다. “아픈 사람은 가까운 곳에서 도움을 줘야 해요.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그들의 아픔을 느끼기 힘듭니다.”

그렇게 그는 ‘신부전증 장애인 복지시설’의 빈방으로 들어갔고, 환자들과 24시간을 공유했다. 환자들의 길동무도, 말동무도 그였다. ‘죽음으로 가는 길’을 모신 어르신도 한두명이 아니었다.

‘아픈 사람과의 동행’, 쉽지 않은 길이었다.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아내던 어르신이 돌아가시면 며칠씩 잠을 못 잤다. 무뚝뚝했던 할머니를 보낸 그날은 유독 그랬다. 슬픔이 그의 심신을 날카롭게 깎아냈다. “함께 살면서 돕는 일, 정말 불가능한 걸까? 이제 그만할까?”

▲ ‘빈집 프로젝트’ 당시 백혈병 환우가족이 머물렀던 방. 건물 주인이 바뀐 지금은 공사 중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그때, 휴대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따르릉! 따르릉!” 그의 삶에 기꺼이 동행한 두살 터울 동생 김명호씨의 전화였다. 그 역시 ‘만성 신부전증’ 환자였다.

# 3장. “동생아! 눈 떠라!”

명호씨는 아픔이 많았다. 어릴 때 합병증을 앓은 탓에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스무살이 넘어선 ‘만성 신부전증’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명호씨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명호씨의 애마였던 ‘낡은 오토바이’가 동네 언저리에 나타나면 활기가 전달됐다.

조 단장에게도 그는 ‘해피 바이러스’였다.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았다. 남의 아픔을 깊이 헤아릴 줄 아는 따뜻한 친구였다. 무뚝뚝한 할머니가 돌아가신 그날도 그랬다. 조 단장의 슬픔을 절반이라도 나눌 요량으로 명호씨는 전화 버튼을 눌렀다.

▲ 행복 바이러스를 동네에 전달하던 명호씨의 낡은 오토바이. [사진=행복을 나누는 사람들]

“형! 괜찮지? 내가 있잖아. 귀신이 돼서도 지켜줄게.” 둘은 20~30분간 떠들었다. 삶과 죽음을 얘기했다. 조 단장은 다시 내일을 다짐했다. “그래, 명호도 있지 않은가. 힘내자.” 거친 상념을 털어내니 오랜만에 잠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 무렵, 고약한 불청객이 두 사람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걸 조 단장은 눈치채지 못했다. 바로 ‘죽음의 그림자’였다.

그날 밤 11시. 전화벨이 또 울렸고, 다급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단장님, 명호가 쓰러졌어요!” 조 단장은 머리를 감쌌다. 신神이 농간을 부린다는 생각에 성이 났다. 부랴부랴 옷을 껴입고 방을 나서면서 그는 두손을 모았다. “제발 살려주세요!”

하지만 신은 그의 기도를 외면했다. 그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명호씨는 숨을 쉬지 않았다. 뇌출혈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귀신이 돼서 지켜주겠다”던 명호의 농담이 귀청을 때렸다.

할머니에 이은 명호씨의 죽음. 조 단장의 인내는 임계점을 넘어섰다. “아픈 사람과의 동행은 내 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2007년 12월 쓸쓸한 겨울밤. 주인을 잃은 명호씨의 낡은 오토바이는 외롭게 서있었다. 조 단장의 인생도 멈춰서고 있었다.

▲ 아픈 사람들과의 동행은 조인검 단장이 풀어야 할 숙제다. 그는 “어두운 터널을 벗어나면 희망이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 4장. 몹쓸 병, 말 못할 사연

‘천성 좋은 키다리아저씨’.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조 단장을 그렇게 불렀다. 사비를 탈탈 털어 거점형 봉사단체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의 설립(2008년)을 주도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 작은 단체가 사회적기업(2010년)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경기도 부천에 있는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은 한부모가정, 홀몸어르신 등 취약계층에 생활밀착형 지원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적기업이다. 지역급식업체와 연계해 운영하는 ‘푸드뱅크’는 이 기업의 핵심 서비스로, 117개 취약가정에 밑반찬을 선물하고 있다.

지역 사회적기업, 봉사단체들과 손잡고 생필품ㆍ의료용품도 제공한다. 2011~2016년 11억여원어치를 지원했으니, 알찬 후원을 계속하고 있는 셈이다.

▲ 조인검 단장은 따뜻한 사람이다. 그 누구에게도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있는 자리엔 ‘웃음꽃’이 핀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 기업이 지역 내에서 주목 받은 이유는 또 있다. 2009~2013년 취약계층에게 ‘빈집’을 무료로 제공하고 밀착형 생활지원서비스를 펼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홀몸어르신, 장애인, 불치병 환자 등 취약계층과 함께 살면서 돕는 ‘빈집 프로젝트’였는데, 연평균 150가구를 지원하는 성과를 올렸다. 여기엔 “힘없고 아픈 사람들을 진심으로 돕고 싶다면 기꺼이 동행해야 한다”는 조 단장의 철학이 깃들어 있었다.

이런 조 단장에게 몇몇 이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대기업을 마다하고 ‘희생의 길’을 선택한 것도 모자라, 무서운 병에 걸린 이들과 동고동락하고, 사비를 털면서까지 돈 안 되는 사업에 인생을 바치고 있으니, 누가 그를 선뜻 이해했겠는가.

하지만 그에게도 말 못 할 사연이 있었다. 한때 그도 원인 모를 병에 시달렸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진작에 ‘삶의 끈’을 놔버렸을지 모른다. 그의 인생을 위협한 병마病魔가 찾아온 건 1995년이었다.

# 5장. 이상한 통증, 죽음의 공포


1995년 1월, 참 낯선 날이었다. 별일도 없었는데, 다리가 너무 아팠다. 진통제로 통증을 다스렸지만 그때뿐이었다. 조 단장은 당시 육군 대위였다. 사람들이 “꾀병 아니야”라고 농을 칠 정도로 건장했다.

▲ 1991년 조인검 단장의 임관 모습. 그는 1997년 6월 육군 대위로 전역했다. [사진=행복을 나누는 사람들]

그런데, 깡으로 버틸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통증이 발생한 지 한달여 만에 진통제가 듣지 않았다. 근육이 찢어질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움직일 수도, 먹을 수도 없었다. 살이 쭉쭉 빠졌다.

건장했던 체격이 38㎏까지 쪼그라드는 데 두달이 채 안 걸렸다. 군 병원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던 그는 결국 ‘집(부산)’으로 쫓기듯 내려왔다.

문제는 ‘병명病名’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한 병원에선 뼈암을 의심했다. 어떤 병원에선 대퇴골두무혈성괴사라면서 ‘다리를 자르겠다’고 나섰다. 갑자기 찾아온 원인 모를 병. 거칠게 없었던 그에게 ‘죽음의 공포’가 몰려왔다.

“이렇게 아플 바에야 차라리….” 하루에도 몇번씩 딴생각을 가슴에 품었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들을 수발하는 홀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딴생각’을 실행에 옮겼을지 모른다. 그는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아픈 사람들의 마음이 그제야 이해되더라구요. 통증이 심해질 무렵, ‘희망의 집(전역 후 첫 직장)’에 월 20만원씩 기부했어요. 그래야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았죠.” 화마의 땅에서도 새순이 돋듯, 통증은 그에게 ‘새 길’을 제시하고 있었다.

# 6장. 가을에 찾아온 기적

통증에 시달린 지 벌써 1년 반. 별별 민간요법은 다 받아봤다. 동전으로 긁어 피를 내봤고, 벌침도 맞았다. 심지어 굿판까지 열었지만 차도가 없었다.

그런데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1996년 가을, 그를 사납게 괴롭히던 통증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부기가 빠지더니 살이 쪘다. 뼈암을 의심했던 의사도, ‘다리를 자르겠다’던 의료진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만한 일이었다.

▲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릴 때 조인검 단장은 ‘나쁜 생각’을 숱하게 했다. 그는 “홀어머니의 눈물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고 말했다. [사진=행복을 나누는 사람들]

병원약이 통했는지, 벌침이 먹혔는지, 아님 굿판이 신력神力을 발휘했는지 그도, 의료진도 모른다. 중요한 건 기적이 찾아왔다는 거였다. 병마를 이겨낸 그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돼있었다는 점이다.

1997년 6월 건강하게 군을 전역한 그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대기업 2곳에서 ‘러브콜’을 보냈기 때문이다. IMF 외환위기가 우려되던 시절, 남들은 못 들어가서 안달인 곳이었다. 그는 손사래를 쳤다. “죽을 만큼 아픈 다음에 깨달은 게 있습니다. 작은 도움이 필요한 약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힘을 주고 싶습니다.”

그는 ‘희망의 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통증이 그를 찾아왔을 때 ‘후원금’을 처음 넣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1999~2000년엔 장애인공단 등 복지시설의 일을 도왔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진 장애인 생활시설 ‘로뎀나무’에서 일했는데, 무뚝뚝한 할머니, 명호씨를 만난 건 그때였다. 조 단장은 “병마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남을 도와야 하는 이유’를 가르쳐줬다”고 말했다. 그래, 그는 키다리아저씨가 돼가고 있었다.

# 7장. 숙명, 큰 물줄기처럼 …

다시 2007년 12월. 조 단장은 진득한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내뿜었다. “푸~.” ‘만성 신부전증’을 앓던 명호씨를 저세상으로 보낸 날. 조 단장은 자신이 ‘키다리아저씨’가 될 수 없다는 걸 여실히 느꼈다. 아픈 사람들과 동행하기엔 슬픔에 너무도 약했다.

▲ 오랜만에 ‘빈집프로젝트’를 진행했던 건물을 찾은 조인검 단장. 별이 된 아이들이 반기듯 빛줄기가 쏟아졌다. [사진=오상민 작가]

명호씨의 초상初喪을 치른 다음날, 그는 자신을 후원하던 병원(가은병원)을 찾아가 ‘끝’을 통보했다. “베풀어주신 은혜 못 갚고 떠납니다.” 그의 ‘아픈 동행’을 응원하던 기평석 병원장은 따뜻한 진심을 꺼내 보이며 만류했다. “무뚝뚝한 할머니와 명호씨에게 자네가 없었다면 어땠겠는가. 누구든 운명을 다하네. 그것 역시 숙명 아니겠는가.”

숙명宿命.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풀어보면, ‘내 운명에 숙박한 무언가’라고 해석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 큰 물줄기는 변하지 않는다. 잠시 뒤틀려도 또다른 물줄기와 해후邂逅한다.

인생도 그렇다. 인력으로 막아도 숙명처럼 흐르는 ‘맥’이 있다. 갑작스러운 병, 원인 모를 회복, 무뚝뚝한 할머니의 칭찬, 명호의 전화와 죽음…. 어쩌면 이 모든 게 큰 물줄기 같은 숙명이 아닐까.

여러 갈피의 생각이 조 단장의 머리를 스쳤고, 방향이 정리됐다. “그래! 물줄기를 그냥 좇자. 숙명을 피하기 어렵다면 그냥 껴안자. 아픈 사람과의 동고동락, 그들과의 동행을 잠시 멈추더라도 실패하는 게 아니다. 그게 끝인 것도 아니다. 어쩌면 그 또한 숙명이다.”

▲ 조인검 단장은 말 그대로 전천후다. 밑반찬을 포장하고, 배달하는 것도 그의 몫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아픈 동행’을 잠시 내려놓는 대신 그는 “할까 말까” 장고를 거듭하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사단법인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을 설립(2008년 3월)하는 거였는데, 오랜 후원그룹인 가은병원ㆍ휴앤유병원(이명룡 원장) 등의 임직원이 힘을 보탰다. 법인명 그대로 ‘행복을 나눠주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었다.

# 8장. “멈춤은 끝이 아니다”

“멈춤은 실패가 아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멈춤의 기간을 통해 성장하고 도약했다.”
- 「위대한 멈춤」 중에서 -


조 단장은 한결 여유로워졌다.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과 함께 밑반찬 배달 서비스, 가사 지원, 민원 대행 등 다양한 일을 힘껏 추진했다. 취약계층이 생필품ㆍ재활용품을 값싸게 구매할 수 있는 유통대행 서비스도 펼쳤다.

그는 웃음을 되찾았다. 밑반찬을 배달할 때면 휘파람을 불면서 명호씨의 오토바이를 탔다. 사람들은 그를 통해 명호씨를 떠올렸고, 조 단장은 그렇게 명호씨와 동행했다.

그러던 2008년 11월, 정부로부터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자신들이 인건비를 지원할테니, ‘긴급주거지원사업’을 함께 해보자는 거였다. 한부모가정, 홀몸어르신, 아픈 이들에게 ‘살 공간’을 내주고 ‘밀착형 생활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취지였다. 쉽게 말해 빈집 프로젝트를 통한 동행, 그걸 해보자는 거였다.

▲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의 직원이 배달 용기에 밑반찬을 담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 제안을 들은 조 단장은 빙긋이 웃었다. 숙명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과의 동고동락, 그걸 다시 하라는 계시 같구나.” 명호씨의 마지막 말이 귀를 스쳤다. “형님, 귀신이 돼서 지켜준다 하지 않았소. 아프지만 함께 갑시다.” 그는 잠시 접어놨던 ‘동행’을 다시 준비하고 있었다.

# 9장. 빈집에 햇살이 머물다

봄바람이 살랑이던 2009년 5월.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은 부천시 송내동 676번지에 5층짜리 빈 건물을 후원받았다. 긴급주거지원사업을 요청받은 지 반년 만이었다.

조 단장은 빈집을 새집처럼 꾸몄다. 4000만원을 들여 수도ㆍ전기ㆍ난방시설을 새로 갖췄다. 방을 누렇게 만든 얼룩을 말끔히 지우고, 깨진 유리를 막기 위해 찢어붙인 종이를 일일이 떼냈다. 그러자 햇살이 들어와 빈집을 밝혔다.

1층엔 무료급식소를 만들었다. ‘동네 사랑방’처럼 어르신들이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2~4층엔 주거시설, 5층 옥탑방에는 사무실을 뒀다. 조 단장은 그곳에서 ‘동행’을 재개했다.

장애인가족 2가구, 소년소녀가장 2가구, 백혈병 환우가족 12가구 등 16가구가 입주했다. 주로 4~5살이던 백혈병 환우들은 ‘큰 병원’을 찾아 지방에서 올라온 아이들이었다. 몸이 성치 않았지만 애들은 애들이었다. 아프지만 않으면 “까르르” 웃는 소리가 빈집을 떠나지 않았다. 조 단장은 삼촌이자 반장이자 훈육 선생님이었다.

▲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은 2009년 5월 ‘빈집’을 후원받아 ‘빈집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리모델링 후 빈집의 외관. [사진=행복을 나누는 사람들]

아이들이 병원에 갈 때도, 산책 갈 때도, 공부를 할 때도 그가 옆에 있었다. 말 그대로 24시간 생활밀착형 서비스였다. 그렇다고 이 빈집이 완전무결했던 건 아니었다. 백혈병은 무서운 병이었다. ‘빈집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늠할 매서운 변수이기도 했다.

# 10장. “삼촌, 별이 되고 싶어요”

백혈병은 생각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고열, 의식저하, 호흡곤란은 예삿일이었다. 때론 환우들의 면역기능이 확 떨어졌고, 패혈증도 발생했다. 포근했던 빈집에 ‘백혈병 공포’가 엄습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눈을 감고 빈집을 떠나는 환우들이 늘어났다. 사나운 병마를 이겨내기엔 너무도 어린 나이였다. 그때마다 가족이 교체됐고, 공동체를 지탱하는 끈이 약해졌다. 조 단장과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이 아무리 가까운 곳에서 헌신적으로 도와도 병마를 물리칠 순 없었다. 개중엔 잊을 수 없는 이별도 있었다.

▲ 백혈병 환우의 병원 이송 지원 활동. [사진=행복을 나누는 사람들]
가을바람이 한기寒氣를 몰고오던 2010년 10월 어느날. 백혈병 환우 규진(가명ㆍ당시 8세)과 혜연(가명ㆍ7세)이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서로 “미끄럼틀을 먼저 타겠다”면서 고집을 부린 게 작은 다툼을 불렀다.

조 단장이 어르고 달랜 끝에 뜯어놨지만 혜연이가 문제였다. 작은 아이의 ‘분忿’은 ‘화’를 불렀고, ‘화’는 합병증을 몰고왔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병원에 입원한 혜연이로부터 “삼촌(조 단장)을 보고 싶다”는 연락이 온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별이 아름답게 쏟아지던 날, 그는 혜연이를 찾아갔다.

혜연 : “삼촌, 저기 별 보여요?”
조 단장 : “어! 오늘따라 별이 밝네.”
혜연 : “삼촌, 이젠 별이 되고 싶어요.”
조 단장 : “그런 말이 어딨어. 빨리 집에 가서 미끄럼틀 타자.”

그게 마지막이었다. 혜연이는 하늘을 밝히는 ‘별’이 됐다. 조 단장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무뚝뚝한 할머니, 명호씨가 떠올라 감정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혜연아! 아름다운 별이 되거라. 이젠 삼촌이 지켜줄게.”

# 11장. “스스로 벌어 제대로 돕자”

후회가 몰려왔다. “좀 더 세심하게, 좀 더 많이 지원했다면 혜연이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지만 ‘빈집 프로젝트’의 빈틈이 그의 눈엔 너무도 크게 보였다.

며칠을 끙끙 앓았다. 그에게 이별은 ‘통증’이었다. 하지만 명호씨와 헤어졌던 그때와 같을 순 없었다. 무능력한 방관자처럼 ‘아픈 동행을 못 하겠다’면서 물러서선 안 됐다. 슬프던 아프던 빈집 프로젝트를 정비해야 했다.

▲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의 직원들이 복사골김치를 만들고 있다. 주문 들어온 수량에 맞춰 수작업으로 진행한다.[사진=오상민 작가]
▲ 복사골 김치는 최고의 재료로 만든다. 배추는 해남, 고춧가루는 괴산, 소금은 신안에서 받았다. 조 단장은 “제값을 하는 김치를 만들기 위해 비용과 노력을 투입했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사람들의 얕은 관심, 약한 재정, 공동체의 허약한 끈…. ‘빈집 프로젝트’의 난제는 생각보다 숱했다. 가장 현실적인 고민은 역시 비용이었다. 백혈병 환우 통원비, 교육프로그램 운영비, 전기요금ㆍ가스비를 비롯한 빈집 관리비 등. 아무리 아끼더라도 월 1000만원은 족히 필요했다.

“후원처를 늘려야 할까, 수익사업을 벌여야 할까.” 조 단장은 갈림길에 섰고, 장고 끝에 수익사업을 택했다. “스스로 벌어 제대로 돕자”는 취지였다. 그는 ‘김치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푸드뱅크에서 ‘김치’를 떼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김치를 정성껏 만들어 팔면 의미도 있을 것 같았구요.”

2011년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은 식품제조업 허가를 받았다. 이듬해엔 ‘복사골김치’를 론칭했다. 복사골은 부천의 옛 지명이다. 김치공장에는 HACCP(식품안전관리인증기준)을 적용했고, 재료는 최고를 택했다. 배추는 해남, 고춧가루는 괴산, 소금은 신안에서 받기로 했다. 조 단장은 “제값 하는 김치를 만들기 위해 비용과 노력을 투입했다”고 말했다.

혹자는 ‘김치로 뭘 하겠다고 그리 발버둥을 치느냐’고 꼬집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에겐 그렇지 않았다. 김치는 빈집 프로젝트의 디딤돌이었다. 아픈 이들과의 동행을 위한 마중물이었다. 그래, 숙명이었다.

# 12장. 두번째 실패, 그리고 희망

김치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조 단장과 ‘행복을 나누는 사람들’이 혼신의 힘을 쏟은 결과였다. 하지만 패착도 있었다. 김치사업에 집중하기 위해 ‘빈집’에 있던 사무실(5층 옥탑방)을 김치공장 옆으로 옮긴 게 부작용을 일으켰다. 백혈병 환우가족 등 ‘빈집 식구들’과 멀어지면서 정서적 간극間隙이 생겼던 거다. 그 사무실은 조 단장이 머물던 곳이었다.

▲ 밑반찬을 받은 수혜자들이 보내온 감사쪽지들. [사진=행복을 나누는 사람들]

“아픈 이들과 동행을 하려면 생활과 공간이 밀착돼야 해요. 그래야 깊이 있는 도움을 줄 수 있죠. 우리의 실수였어요. 자금 마련에 집착해 김치사업만 생각했죠. 그 사이 생활밀착형 서비스가 느슨해졌고, 공동체는 약해졌어요.”

조 단장은 어쩔 수 없이 ‘빈집 프로젝트’를 멈추기로 했다. 마지막 남은 세가족에겐 “빈집 프로젝트를 잘 추슬러 동행을 계속하겠다”며 잠시 이별을 고했다. 조 단장으로선 만성 신부전증 환자에 이어 두번째 실패였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기약 있는 이별’이었기에 괜찮았다.

그로부터 4년이 훌쩍 흘렀다. 김치사업은 나름 안착했다. 거래처는 15곳으로 늘었고, 매출은 월 2000만원에 이른다. ‘숨쉬는 캔포장’ ‘1인가구세트’ 등 신제품도 개발•출시했다.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에 복사골김치를 납품한 것도 알찬 성과다.

조 단장은 요즘 ‘동행’을 다시 준비하고 있다. “제 돈을 탈탈 털든 아니면 경매를 하든 올해 안에 집을 마련해 ‘빈집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할 겁니다. 밑자본을 충분히 만들진 못했지만 여건은 조성된 것 같아요.”

▲ 조인검 단장이 경기도 부천에 있는 행복한 동행 카페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이곳은 누구나 쉽게 드나들 수 있는 동네 사랑방이기도 하다. [사진=오상민 작가]

조 단장은 얼마 전 직접 그렸다는 ‘빈집 도면’을 수줍게 꺼내보였다. 1층엔 무료급식실, 2층엔 교육실, 3~4층엔 주거시설이 배치돼 있다. 도면의 맨 위편엔 ‘행복한 집 1호점’이라고 쓰여 있다.

몸서리치게 아팠던 그때 그 동행은 그에게 더이상 ‘아픔’이 아닌 듯했다. 순간, 무뚝뚝한 할머니의 웃는 낯이 스쳤다. 명호씨의 농담이 귀를 간지럽혔다. 별이 된 혜연이가 예쁘게 반짝였다. 그가 낡은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었다. “부릉부릉!!” 김치 만드는 키다리아저씨가 ‘아플지언정 행복한 동행’을 시작했다.

글=이윤찬 더스쿠프 기자
chan4877@thescoop.co.kr

사진=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저작권자 © 더 스쿠프(The Scoop)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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