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매트릭스(Matrix) ❻

매트릭스의 세계는 합리주의와 보편주의가 지탱한다. ‘2×2=4’라는 절대공식에서 벗어나면 매트릭스의 세계가 자랑하는 마천루들은 단 한순간도 버틸 수 없다. 한치의 오차도 없이 설계된 매트릭스의 세계는 한순간에 정지되고 붕괴할 수밖에 없다.

 
매트릭스 특수요원 스미스 요원은 저항세력의 트리니티, 모피어스, 네오를 추격하고 격렬한 전투를 벌이지만 검정 양복과 흰 와이셔츠 그리고 검정 넥타이는 한점 흐트러짐이 없다. 검정 재킷 단추까지 채운 단정한 모습으로 격렬한 쿵푸 대결을 펼치는 스미스를 비롯한 요원들의 모습은 경이롭다.

한차례 격렬한 전투가 끝나면 스미스를 비롯한 요원들은 습관처럼 가장 먼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넥타이를 바로 잡는다. 빈틈이 없다. 매트릭스 세계의 바둑판같은 거리를 걷는 행인들의 옷차림도 유니폼처럼 가장 무난하고 합리적이고 보편적이다.

합리주의와 보편주의를 중심으로 한치의 오차 없이 설계된 매트릭스의 세계는 위대하지만 그곳에 정작 ‘인간’은 없다. 인간의 ‘합리적 이성’을 전제로 하는 합리주의는 자연을 넘어 인간까지도 합리적으로 재단하고 규정짓는다. 이성에 의해 분석되고 설명되는 인간은 ‘주체’가 아닌 ‘객체’로 전락하고 만다.

▲ 스미스 요원은 모피어스 일당과의 격투에도 옷매무새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다.[사진=더스쿠프포토]
객체는 폭력과 배제의 대상이 된다. ‘2×2=4’와 같은 ‘지당한 답’이 ‘정상적이고 긍정적인 것’이 된다. ‘정상’이 규정된 세상에는 반드시 ‘비정상’의 낙인도 준비된다. 비정상의 낙인은 인간의 본성과 욕망을 억압한다. 인간을 인간적인 삶으로부터 소외시키는 매트릭스의 세계는 질서 대신 인간성과 개성의 자유를 꿈꾸는 인간들을 지하로 숨어들게 만든다.

매트릭스 3편에서 매트릭스의 세계를 거부하고 지하세계로 숨어든 인간들의 최후의 보루인 ‘시온(Zion)’에서 진정한 인간들이 펼치는 축제는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 제국에 정복당한 뒤 “우리는 바빌론의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는 시편의 구절처럼 나라를 빼앗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고향을 가리켜 시온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감독인 워쇼스키가 유대인이라서 유대인들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시온’을 인공지능에 정복당한 인류의 마지막 남은 성소聖所의 이름으로 차용한 듯하다.

시온의 축제광장은 아무런 장식이나 흔한 조명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거칠고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고물상 고철덩어리 같은 그들의 함선 네브카드네자르 호와 판박이다. 원시인들이나 살법한 동굴과 같은 지하공간에서 펼쳐지는 그들의 축제는 생명이 펄펄 끓고 무질서하고 관능적이다. 퇴폐적이고 음란하기까지 하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느낌과 본능에 충실하다. 그들이 추는 춤의 장르는 헤아릴 길이 없다. 춤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하고 그저 몸부림에 가깝다. 옷차림도 모두 방금 동냥질에서 돌아온 다리 밑 각설이패 같다. 분명 ‘약’먹은 것은 아닐텐데 모두 약에 취한 듯하다. 통제되지 않은 ‘날것’으로서의 생명이 넘쳐난다.

시온에는 매트릭스 세계에 없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이 있다. 어떤 인공조형물도 없는 원시인들의 동굴과도 같은 시온에는 굳이 2×2=4라는 공식이 존재할 필요가 없다. 2×2가 5라고 해도 상관없고 6이라고 해도 시빗거리가 될 이유가 없다. 한마디로 ‘개판 5분전’이다. 그렇지만 자유가 충만하고 모두 행복해 보인다.

▲ 본래 냉소주의 철학자들은 욕망에서 벗어나 정신적 행복을 추구하고자 했다.[사진=아이클릭아트]
모피어스 일당을 비롯한 시온의 마지막 인류는 어쩌면 가장 전형적인 ‘냉소주의자(cynicist)’들일지도 모르겠다. 냉소주의(cynicism)의 그리스 어원은 ‘개같이(dog-like)’이다. 그래서 냉소주의 철학자를 ‘견유학파犬儒學派(Cynics · Kynikos)’로 부른다. 한마디로 ‘개같이 살자’는 학파이다.

근대 이후 냉소주의는 세상의 모든 기성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무시하고 비꼬고 비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하지만 그리스 시대 술통 속에 살았다는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로 대표되는 본래의 ‘키니코스(Kynikos) 학파’는 부富와 지위, 명성과 같은 헛되고 공허한 모든 기존의 욕망에서 벗어나 소박한 삶을 살며 진정한 ‘정신적 행복(eudaemonia)’을 추구했던 학파다. 아무런 소유물 없이 아무데서나 먹고 자고, 사랑한다. 그러나 개가 자신의 주인을 지키듯 자신의 주인인 ‘인간의 존엄성’을 목숨을 걸고 지킨다. 워쇼스키 감독이 시온의 축제를 ‘행복한 개판’으로 묘사한 이유를 알 듯하다.

합리성이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원칙과 규정과 규범들이 숨을 막히게 하는 세상이다. 그 수많은 원칙과 규범들이 모두 인간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왠지 그럴수록 인간은 소외되어간다. 그래서일까. 문재인 정부의 ‘사람이 먼저’라는 슬로건이 꽤나 마음에 와 닿는다. 사람이 사라진 질서정연한 매트릭스의 세계보다는 시온의 ‘행복한 개판’을 꿈꾼다. 2×2가 꼭 4가 아니어도 좋은 세상을 꿈꾼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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