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미국 방문경제인단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찾았다. 대규모 경제인단이 꾸려졌다. 어마어마한 투자도 약속했다. 문 대통령은 ‘경제외교의 첫 단추를 잘 끼웠다’고 자평할지 모른다. 그런데 냉정하게 말해보자. 돈이 없어서 신입사원도 못 뽑는다며 징징 대는 기업 회장들이 미국에 선물 보따리 건네러 그 먼길을 동행했겠는가. 그들이 바란 건 미국시장이 아니라 대통령의 ‘눈도장’일지 모른다.

▲ 미국 방문 경제인단 선정 기준이 불분명하다는 지적이 많다.[사진=뉴시스]
“대한상공회의소로부터 참가 신청을 하라는 연락을 받고 신청서를 냈다.” 문재인 대통령 미국 방문에 동행하는 경제인들의 명단이 발표되기 전인 6월 21일, 3대 그룹(현대차ㆍSKㆍLG) 관계자는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늘 하던 절차대로 했다”면서 말을 아꼈지만 다른 기업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익명을 원한 한 대기업 고위 임원은 이런 말도 했다. “대통령의 미국 방문에 동행하는 건 청와대 관계자들과 친목을 도모하고, ‘대통령과 동행한 믿을 만한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준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정치적 변수에 따라 기업 이미지가 달라질 수 있어 리스크도 있다. 때로는 필요하지 않지만 청와대 눈치를 살펴 신청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괜히 ‘끈’을 못 만들면 찍힐 수도 있어서다.”

그동안 대통령의 해외 순방 동행 여부는 해당 기업과 정부의 친밀도를 가늠하는 척도로 인식돼 왔다. 주관 경제단체가 신청서를 받아 추천하면 청와대가 가부可否를 결정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스템은 ‘양날의 칼’과 같다. 정부가 기업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정경유착’의 씨앗이 뿌려질 가능성이 높아서다.

국정농단 사태를 계기로 무너진 박근혜 정부를 보면 그 가능성을 허투루 봐선 안 된다. 박근혜 정부는 주관 경제단체의 추천을 받기는커녕 직접 해외 순방 동행 기업 명단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재계 제1단체격이던 전경련은 ‘다리 역할’을 했다는 게 정설이다. 정부가 직접 ‘기업 줄 세우기’를 했다는 건데, 아니나 다를까 박근혜 정부는 ‘정경유착’ 때문에 무너졌다.
눈여겨볼 점은 ‘적폐청산’을 외치며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이전 정부와 크게 다른 길을 걷지 않는다는 점이다. 경제사절단에 포함된 4대 그룹 중 사업적 측면에서 ‘방문 목적’을 먼저 따진 곳은 없다. ‘가느냐 마느냐’를 간택받은 다음 ‘목적’을 강구했다. 4대 그룹 중 한곳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미국에 굳이 방문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구체적인 건 아직 없고, 동행이 결정되면 준비할 것이다.” 의사결정의 순서가 뒤바뀐 셈이다.

4대 그룹 “가서 뭘 할지…”

청와대가 대한상의의 추천 명단을 본 후 일부 기업인을 콕콕 찍어 가감했다는 정황도 나온다. 6월 23일 미국 방문 경제인단 명단이 최종 발표되기 전 시중에 유출된 잠정 명단에는 허수영 롯데그룹 사장, 정현호 메디톡스 대표가 포함돼 있었는데, 청와대 측에서 제외했다는 거다.

반면 박성택 산하 회장(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은 당초 심의 과정에서 “경제단체와 협회는 전원 제외한다”는 방침에 따라 제외됐지만 “현 정부가 중소기업 살리기를 중시하는데 뺄 수 없다”는 청와대 요청에 의해 개별기업 대표 자격으로 다시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기승 한양 회장과 장정호 세원셀론텍 대표도 대한상의의 명단엔 없었다가 청와대 요청에 의해 포함됐다.

“중소기업 대표만 데려가는 게 뭐가 문제냐”고 물으면 답을 하기 어렵다. 하지만 “왜 그 중소기업 대표만 데리고 가느냐”고 물으면 논란의 여지가 생긴다.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기업 줄 세우기가 재현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얘기다.

더구나 청와대와 미국 방문 경제인단이 미국에 도착해 내놓은 첫 소식은 “미국 방문에 동행한 52개 기업들이 향후 5년간 대미 투자에 128억 달러(약 14조6000억원)를, 구매에 224억 달러(약 25조6000억원)를 쓸 것”을 약속했다는 거였다. 박근혜 정부가 주로 양해각서(MOU)를 맺은 사례를 중심으로 “정부가 기업의 세일즈를 돕는다”는 걸 강조했다면 문재인 정부는 “기업들이 ‘선물 보따리’를 통해 외교를 돕는다”는 걸 강조한 거다. 줬느냐 받았느냐만 다를 뿐 ‘기업의 돈’을 활용한 홍보활동이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특히 문재인 정부는 기업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으니 앞으로 베풀어야 할 일도 있지 않겠냐는 관측도 나온다. 정경유착의 은밀한 시그널이다.

선정 기준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일관성이 없었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이번 경제인단 선정 기준은 대미 투자ㆍ교역, 미국 사업실적과 사업계획, 첨단 신산업 분야 협력 가능성 등이었다”면서 “불법ㆍ탈법행위로 사회적 물의를 크게 빚고 있는 기업은 원칙적으로 참여를 제한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기준이 제대로 적용됐는지는 의문이다. 일례로 현재 포스코를 비롯한 철강업계는 미국이 부과한 반덤핑 관세와 상계관세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정부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철강기업 대표는 권오준 포스코 회장을 비롯해 단 한명도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경제인단 선정 기준 작동했나

반면 개별기업 대표로 이름을 올린 박성택 산하 회장은 2015년 회장 선거 당시 선거운동에 법인카드를 사용한 혐의로 올해 4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를 선고받았음에도 명단에 포함됐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국정농단 사태에 연루돼 여전히 법정에 증인으로 서고 있다. 미국 방문 경제인단 선정 과정이 누군가에게는 특혜로 작용하고,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기회를 빼앗은 건 아니냐는 거다.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 기업인들을 끌고 가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강성진 고려대(경제학) 교수는 “대통령이 기업 총수들을 대거 대동해 해외에 나가는 건 구시대적 발상”이라면서 “대규모 순방사절단 운영은 기업에 대통령이 ‘무섭다’는 걸 보여주려는 낡은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적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문 대통령의 의지만으로 적폐를 청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순진한 발상이다.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들, ‘문재인’이나 ‘문재인의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분명 ‘적폐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미국 방문 경제인단은 새로운 적폐를 낳았을지 모른다.
김정덕 더스쿠프 기자 juckys@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