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 지난해 악몽과도 같은 시간을 보냈던 현정은 회장이 부활의 날개를 펴고 있다.[사진=뉴시스]
현정은(62) 회장이 명가 현대그룹 재건에 다시 한번 시동을 걸었다. 사옥을 재매입하고, 대북사업 재개를 준비하는 등 재건 분위기가 역력하다. 유동성 위기 끝에 주력 계열사 현대상선ㆍ현대증권 등을 판지 1년 만이다. 작고한 남편 정몽헌 전 회장에 이어 14년간 강단과 뚝심으로 지켜왔던 현대그룹이 중견그룹으로 추락하는 수모를 지켜볼 수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2016년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해다.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현정은 회장이 올해 1월 2일 신년사에서 한 말이다. 천하의 현대그룹이 30대 그룹에서도 밀려나 자산 수조원대에 불과한 중견그룹으로 축소됐으니 그럴 만도 했다. 14년 전인 2003년 8월 급작스레 작고한 남편 정몽헌 회장의 뒤를 이어 그룹 회장직에 올랐던 그(당시 48세로 전업주부)는 지난해 악몽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경영난을 견디다 못해 주력 계열사였던 현대증권과 현대상선을 남의 손에 넘겨준 건 천추의 한이었다. 그룹 자산규모가 12조원 대에서 수조원 대로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재계 순위도 20위권에서 중견그룹으로 여지없이 추락했다. 작고한 시아버지(정주영)와 남편(정몽헌)의 뒤를 이어 한국 재계의 명가 ‘현대그룹 재건’을 늘 외쳤던 그로선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젠가 다시 한번 그룹 재건을 기약하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전업주부였던 그가 선장을 맡아 현대그룹호號를 몰았던 지난 14년 동안 그의 경영능력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렸다. 취임 초기 흔들렸던 경영권을 지켜내며 ‘한국 재계의 여장부’ ‘현다르크’ ‘뚝심의 승부사’ ‘아시아 파워 여성 기업인’ 등으로 칭송 받았다.

시숙부(정상영), 시동생(정몽준) 등과 치열한 경영권 쟁탈전을 벌인 끝에 그룹을 지켜냈던 게 주효했다. 재계와 국민들에게 야무지다는 이미지를 심어줬고 2009년 8월에는 방북해 북한 김정일과 면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상선ㆍ현대증권 매각 등 그룹의 급격한 위축 과정을 지켜보면서 현대그룹 선장직을 맡기에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받게 된 게 사실이다. 전업주부가 능력을 점검 받지도 못한 채 큰 그룹의 선장직을 맡은 건 역시 무리였다는 일부 세평도 있었다.

▲ 현대 그룹이 10년째 중단된 대북사업을 재개하는데 힘을 쏟을 것으로 전망된다.[사진=뉴시스]
이런 와중에 최근 그가 그룹 재건에 시동을 다시 걸고 나선 게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전열을 재정비하고 여성 특유의 감성경영까지 동원하며 ‘현대그룹 재건’에 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서울 연지동 사옥 재매입, 대북사업 재개 준비, 현대엘리베이터 실적 증가 등이 구체적인 증거다.

연초 신년사에서 그는 “(지난해 그룹 축소 과정에서) 우리의 자긍심에도 상당한 상처가 생겼음은 부정할 수 없다”면서 “다행스러운 것은 부실의 멍에가 더이상 지속되지 않아 미래를 설계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부실’이란 소나기가 지나갔으니 정신을 차리고 앞날을 챙겨야겠다는 속내를 내비친 것이다.

최근 정 회장은 5년 전에 매각과 동시에 세 들어 살았던 서울 종로구 연지동 사옥을 되사는 결단을 내렸다. 대외 이미지 개선과 임직원 사기 진작에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여진다.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었던 현대그룹이 불과 1년 만에 2500억원 상당의 매물을 사들일 수 있는 재무 여력을 확보했다는 방증도 된다.

7월 10일 현대그룹은 주력 계열사 현대엘리베이터를 통해 연지동 사옥을 매각 5년 만에 재매입하기로 결정했다. 매입은 필요한 절차를 거쳐 9월에 마무리 될 예정이다. 1992년 준공된 이 사옥은 지하 4층~지상 12층(동관 기준ㆍ서관은 16층) 규모의 2개동 건물이다. 현대그룹과 현대엘리베이터, 현대경제연구원이 한 건물에, 지난해 팔린 현대상선이 다른 건물에 입주해 있다.

잃었던 사옥 재매입 눈길

현 회장에게는 취임 후 독자적으로 마련한 첫 사옥이었다는 점에서 애착이 강했던 건물이다. 현대그룹은 2008년 현 회장 취임 5주년 때 이 사옥을 1980억원에 사들였다. 하지만 유동성 위기 끝에 5년 만인 2012년 코람코자산운용에 2262억원에 다시 팔고 말았다. 당시 ‘세일즈앤드리스백(매각 후 재 임대)’ 방식을 택해 우선매수청구권을 확보했다.

코람코는 지난 6월 2500억원을 제시한 JR투자운용을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하지만 현대그룹은 우선매수권을 행사해 사옥을 되찾았다.

사옥 재매입이 가능했던 것은 주력 계열사 현대엘리베이터의 실적 상승이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6월 엘리베이터 설치 대수는 2128대로 지난해 6월(1783대)에 비해 19% 이상 증가했다. 올해 5월(1854대)에 비해서도 15% 늘어났다. 이로써 올해 매출목표 1조7000억원 달성에도 서광이 비치게 됐다.

현대엘리베이터 실적 호조에 현 회장은 ‘삼계탕 선물’로 화답해 주목을 끌기도 했다. 여성 CEO 현 회장의 감성 경영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는 7월 3일 엘리베이터 설치 협력사 83개사와 외주협력사 35개사, 주차 협력사 11개사 및 현대엘리베이터 설치담당 직원 등 모두 3160명에게 총 1만2600여마리(4마리 들이 포장)를 선물했다. 창사 이래 월간 엘리베이터 설치 대수 2000대 최초 돌파에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마련한 이벤트였다.

10년째 중단돼 온 금강산 관광 등 대북사업 재개 기대감도 그의 그룹 재건 의욕을 북돋우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 변화로 현대그룹 대북사업에도 햇볕이 들 수 있다는 관측에 힘입었다. 대북사업 창구인 현대아산은 정몽헌 전 회장의 14주기(8월 4일) 금강산 현지 추모식을 위해 정부 당국에 대북 민간접촉 및 방북 승인 요청을 검토 중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8월 한미연합훈련인 을지프리덤가디언과 북한의 추가 도발 가능성, 유엔의 대북 제재 분위기, 미국 트럼프 정부의 대북 강경론 등 변수가 많아 사태는 아직 유동적이다. 금강산관광 사업은 1998년 정몽헌 전 회장이 부친 정주영 회장의 뜻을 이어받아 북측과 계약을 맺고 그해 11월 18일 금강호가 처음 출항하면서 시작됐다.

하지만 2008년 7월 11일 관광객 박왕자씨의 피격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서 10년째 중단되고 있다. 현 회장은 대북사업 재개를 시아버지와 남편의 유지를 이어받는 길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이에 대비해 왔다.

대북사업 재개 움직임

올 들어 현 회장은 자녀들을 통해서도 몇몇 의미 있는 일을 했다. 차녀 정영이(33ㆍ현대유엔아이 차장)씨의 결혼과 막내이자 외아들인 정영선(32)씨의 경영수업 돌입이 그것이다. 이로써 현 회장은 자녀 셋 모두를 혼인시키게 됐고, 현대그룹에서 경영수업도 받도록 했다. 영이씨는 6월 24일 서울 중구 영락교회에서 평범한 직장인과 화촉을 밝혔다.

장녀 지이(40ㆍ현대유엔아이 전무)씨는 2011년 9월 33세 때 결혼했고, 영선씨도 지난해 결혼했다. 영선씨는 5월부터 계열사 현대투자파트너스의 이사로 본격적인 경영수업에 나섰다. 3남매 모두가 어머니 현 회장과 같은 그룹사에서 3세 승계에 대비해 훈련을 받고 있는 셈. 2녀 1남과 함께 사세가 확 줄어든 현대그룹을 재건하기 위해 다시 도전장을 낸 현 회장의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성태원 더스쿠프 대기자 lexlover@thescoop.co.kr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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