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 세컨드 라이프 ➍ 박애란 전 교사

박애란(67)씨는 여고 교사로 있다가 명예퇴직했다. 천직이나 다름없었지만 인생 후반전을 알차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브라보마이라이프의 시니어 기자단으로 있으면서 패션모델로도 활동한다. 발레를 배우고 탱고와 왈츠를 춘다. 무엇보다 꽃다운 나이에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준 야학 선생님들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드는 꿈을 꾼다.

중등교사자격시험 합격증을 손에 쥔 그녀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야학 출신의 늦깎이 방송대 여학생이 주경야독 끝에 마침내 교사의 꿈을 이룬 것이다. 5월이면 일당 20원씩 받고 종일 딸기를 따며 다닌 야학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어른들이 ‘딸기 따는 아가씨가 안경을 다 썼네’ 하던 시절이었죠. 자존심 강했던 열네살 소녀를 딸기나 딴다고 깔본 거예요. ‘아, 나도 나중에 딸기를 사먹는 신분이 될 수 있을까?’ 솔직히 그때는 회의적이었죠.”

수원역 서쪽 서울대 농업생명과학대학이 있던 곳에 자리잡은 푸른지대는 서울의 대학생들이 딸기를 먹으러 오던 명소였다. 고희를 바라보는 전직 교사 박애란씨는 그 시절 일당으로 받은 20원짜리 표를 가게에서 국수로 바꿔 가면 어머니가 저녁끼니로 삶아줬다고 말했다.

“딸기 따는 소녀였지만 신분상승 욕구가 강했습니다. 딸기밭에 흐르던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 차이콥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 팝음악의 여왕 패티 페이지의 체인징 파트너스 같은 곡의 곡명을 열심히 외웠죠. 늘 기품 있고 우아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책을 많이 읽고 클래식 음악을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시절 그녀가 다닌 서둔야학교. 1960년대 경기도 수원시 서둔동에 있던 서둔야학은 서울 농대생들이 만들었다. 스무살 남짓한 선생님들은 서너살 아래의 마을 아이들을 지극정성으로 가르쳤다.

“야학에 가서 살다시피했어요. 내 어린 날 영혼의 성지였죠. 열일곱살 땐 한살 위 남자 선생님을 흠모하기도 했고요. 영혼을 젊음과 맞바꾼 파우스트처럼 그 시절의 저는 영혼을 빼앗겨 다른 사람을 더 이상 좋아할 수 없는 선생님 바라기였어요.”

야학을 졸업하고 열여덟에 대한방직 여공이 된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해 스승의 날 야학을 찾아 선생님들에게 직접 만든 꽃을 달아드린 그녀는 약을 먹었다. 머리엔 꽃 장식을 단 모자를 쓴 채. 이틀 만에 깨어났을 때 머리맡에서 한량이었던 아버지가 울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는 우실 자격도 없다”고 쏘아붙였다.

자살 미수 사흘 만에 그녀는 다시 야학을 찾아갔다. 핼쑥한 얼굴에 표정이 어두운 그녀를 다그치는 선생님들에게 그녀는 저간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선생님들은 소녀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으려 애썼다. 중국집에 데려가 볶음밥을 먹였고, 스무권 넘게 일기를 쓴 그녀를 백화점에 데려가 일기장을 사줬다.

이듬해 그녀는 고입검정고시에 합격했고 타자학원 강사를 거쳐 10년 후 스물아홉에 타자 교사가 됐다. 그러기까지 청소 일, 수위, 군부대 라운지 근무 등 열가지 이상의 일을 했다. 

“피아노가 미치도록 치고 싶었던 여고 시절엔 피아노라고 생각하고 타자기 자판을 두드렸습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피아노를 장만했는데 피아노 치는 아이를 보면서 또 한참 울었죠.”

현직 교사 시절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학생들을 가르쳤다. 새 학년 첫 시간 출석을 부를 땐 김춘수 시인의 ‘꽃’을 읊었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음악과 책에 파묻혀 살기를 바라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수업 시간에 많이 해줬다. 그녀는 또 여학생들에게 “경제적·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있어야 여성도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 박애란 전 교사는 서울대 농대생들이 만든 서둔야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서둔야학을 "어린 날 영혼의 성지"였다고 말했다.[사진=박애란 전 교사 제공]

“교사로서의 자세는 오래전 야학 선생님들에게서 배웠죠. 교사는 직업이 아니라 학생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시절 우리 야학 선생님들은 여유가 있어 우리를 돌봤던 게 아니었어요. 아르바이트로 스스로 벌어 학교에 다녔고, 어렵게 살아 가정 형편이 어려운 우리의 처지를 너무 잘 알았던 거예요.” 지금도 그는 오래 몸담은 평택여고 시절 제자들과 교류한다.

그는 김상진기념사업회 회원이다. 매년 12만원의 연회비를 낸다. 서울 농대 복학생이었던 고 김상진은 1975년 유신헌법 철폐를 부르짖으면서 할복했다. 그가 서울 농대 학생과장 비서로 근무할 때였다. 남다른 그의 사회의식도 ‘불온한’ 야학선생들의 영향이었다.

“‘잘 가그레이. 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고 한 고故 박종철씨 부친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울컥합니다. 온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족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시절 잃었는데요.”

그녀는 50년 전 서둔야학 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드는 꿈을 꾼다.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를 리메이크하고 ‘내 나이가 어때서’를 연출한 한명구 감독과는 영화로 만들기로 의기투합했다. 문제는 제작비다.

“선생님들이 일흔을 넘겨 마음이 급합니다. 서둔야학 선생님들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려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1992년 그 시절 일기장을 사주신 선생님을 뵙고 싶어 통화를 했는데 그때 글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날 밤 글만 쓰고 싶은 병이 들어 일주일 동안 한 끼만 먹고 두시간씩 자면서 미친 듯이 글을 썼어요.”

그 일주일 동안 체중이 8㎏ 빠졌다고 했다. 그녀는 은퇴 세대가 타깃인 월간지 ‘브라보마이라이프’의 브라보동년기자단 소속 기자다. 하루하루를 글 쓰는 재미에 빠져 지낸다. 검색만 하면 어떤 정보든 얻을 수 있는 이 시대가 그녀는 너무 좋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열여덟에 눈을 감았다면 못 살아 봤을 세상이죠. 삶의 환희가 세컨드 라이프를 살아가는 저의 동력입니다.”

그녀는 스타일리스트를 자처하고 패션 디자이너 겸 패션모델, 수필가로도 활동 중이다. 발레를 배우고 탱고와 왈츠를 춘다. “옷 입는 것도 일종의 예술 행위입니다. 뼛속까지 여자로서 예쁘게 입고 싶어요. 저는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날 거예요.”

그녀의 딸은 엄마를 ‘공주암’ 환자 또는 럭비공이라고 부른다.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전화를 걸어 “인류를 위해 잡스보다 엄마가 갔어야 했다”고 말했을 때도 딸이 그랬다. “남은 여생도 세상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을 간직한 채 재미있게 살고 싶어요. 글 잘 쓰는 패션 디자이너로요.” 

건강수명 다하는
5년 후가 인생의 정점

박애란씨는 지금이 자신의 인생의 황금기라고 말했다.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어 삶의 만족도가 높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 전반부는 식구들 부양하느라 먹고살기 바쁘죠. 후반생은 취미생활 등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봤자 건강 나이 72세입니다. 자기 발로 걸어다니면서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퇴직 후 10년 남짓이에요.” 그는 100세 시대라지만 건강 수명 후에도 좋은 시절이 이어지기는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5년 전 62세 때 그는 천직으로 여기던 교사직에서 명예퇴직했다. 곧바로 평택에서 서울로 이사해 라사라패션학원에 등록했고 이수 후엔 창업스쿨을 다녔다. 평택여고 교사로 있던 10년 전엔 퇴근 후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해 압구정동에서 놀았다. 전철을 총알택시로 갈아타고 집에 도착하면 새벽 2시였다고 한다. 

“지하철 압구정역 2번 출구 쪽엔 오페라동호회, 4번 출구로 나가면 탱고동호회가 있어요. 노는 것도 연습이 필요해요. 은퇴 후 제대로 놀려면 10년은 준비해야 돼요.”
이필재 더스쿠프 인터뷰 대기자 stolee@thescoop.co.kr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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