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공백기였던 2008년 삼성 실적잔치

“오너 공백이 걱정된다.” 재판부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하자 재계는 한탄했다. 가뜩이나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데 이 부회장의 공백이 기업 경쟁력에 나쁜 영향을 끼칠 게 뻔하다는 거다. 하지만 이건희 회장이 잠잘 때도 삼성그룹 시계는 잘 돌아갔다. 이젠 ‘오너 경영’의 비뚤어진 신화를 고쳐 쓸 때다.

▲ 10년 전 이건희 삼성 회장은 경영쇄신안을 발표했지만 삼성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사진=뉴시스]

“저는 오늘 삼성 회장직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아직 갈 길이 멀고 할 일도 많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난날의 허물은 모두 제가 떠안고 가겠습니다. 그동안 저로부터 비롯된 특검 문제로 국민 여러분께 많은 걱정을 끼쳐 드렸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리면서 이에 따른 법적, 도의적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2008년 4월 이건희 삼성 회장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이 회장이 국민을 향해 머리를 숙이게 된 발단은 2005년 검찰 수사다. 그해 삼성그룹은 최대 위기를 맞았다. 정ㆍ관계 로비 의혹이 담긴 ‘X파일’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검찰 수사 방향이 사실 규명보단 ‘불법 도청’으로 선회하면서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났다.

그렇게 2년, 수면 아래로 내려앉았던 X파일의 뇌관에 다시 불이 붙었다. 2007년 삼성그룹 법무팀장으로 일하던 김용철 변호사의 내부고발이 ‘발화점’이었다. 그는 거액의 비자금과 정ㆍ관계를 향한 무차별 로비, 경영권 승계 의혹 등을 일거에 폭로했다.

“국가 권력 위에 삼성이 있다”는 정황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면서 ‘삼성비자금 특검팀’이 만들어졌고 이 회장은 다시 벼랑으로 몰렸다. 당연히 여론이 들끓었고, 이 회장은 2008년 4월 대국민 사과와 경영쇄신안을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X파일 폭로에도 요지부동

쇄신안은 제법 날카로웠다. 자신을 포함한 그룹 수뇌부들이 동반 퇴진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룹 컨트롤타워인 전략기획실도 해체하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차명계좌 실명전환과 사회환원 ▲은행업 진출 포기 선언을 비롯한 금융사업 투명화 ▲삼성과 직무 관련성이 있는 사외이사 교체 ▲지주회사 전환 문제 검토 ▲사장단협의회 및 산하 업무지원실 신설 등 혁신안이 덧붙여졌다.

 

이 회장의 퇴진에 재계는 탄식했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삼성은 위기의 순간 때마다 과감한 결단을 내려 기업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키는 계기로 삼아왔다. 그런 결정을 할 수 있는 이 회장이 퇴진했으니 삼성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게 됐다. 삼성이 우리나라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한 만큼 우리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회장의 공백과 전략기획실의 부재를 우려한 거다.

시민사회의 분위기는 달랐다. 그의 퇴진과 경영쇄신안을 반겼다. 정경유착의 배경에 ‘황제 경영’이 도사리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찌 됐든 경영쇄신안 발표 이후 이 회장은 삼성전자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면서 ‘전前 회장’이 됐다. 예고한대로 전략기획실은 해체됐고, 소속 임직원들은 계열사로 뿔뿔이 흩어졌다. 계열사 독립경영 돌입, 투자조정위원회와 브랜드관리위원회 구성 등 다양한 변화도 잇따랐다.

‘이건희→전략기획실→각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로 이어지는 폐쇄적인 의사결정은 그렇게 막을 내리는 듯했다. 삼성은 “사장단협의회와 그 산하에 투자조정위원회ㆍ브랜드관리위원회를 설치하면서 계열사 독립경영체제를 갖췄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겉모양만 바뀐 것’이라는 지적도 만만치 않았다. 새로 설치된 위원회가 여전히 ‘옥상옥’ 역할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당시 경제개혁연대는 “협의체를 통한 계열사 자율경영을 표방했던 삼성그룹의 경영쇄신안이 결국 이 부회장 후계구도로 가는 과도적 미봉책”이라며 “여전히 컨트롤타워가 명실상부하게 권한에 상응하는 책임을 부담하고 있지 않다”고 꼬집었다.

비난은 2010년 3월에 더 거세졌다. 퇴임 선언 23개월 만에 이 회장이 여론이 잠잠해진 틈을 타 경영 복귀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재계가 우려하던 ‘삼성의 위기’를 근거로 복귀했지만 명분이 부족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삼성그룹은 매출 100조원에 영업이익 10조원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재계는 ‘왕의 귀환’을 환영했다. 이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의 부활로 삼성이 더 성장할 거라는 기대감이었다. 물론 이 회장의 복귀가 삼성그룹에 ‘활력’을 전달했을지 모른다. 그의 과감한 의사결정이 투자를 촉진하고, 위촉된 산업의 활로를 뚫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의 복귀는 ‘옛 체제로의 귀환’을 뜻했다. 해체됐던 전략기획실은 ‘미래전략실’이라는 이름으로 복원됐고, 일부 혁신안의 논의는 중단됐다.

이런 옛 체제에 다시 메스가 가해진 건 이 회장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2014년 이후다. 삼성은 “신생 기업의 문화를 닮겠다”며 ‘컬처 혁신’을 선포했다. 이 혁신은 실용주의를 지향한다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 ‘뉴삼성’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하지만 바뀐 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회장이 되살려놓은 미래전략실은 이 부회장에게 옮겨갔다. 그 미래전략실은 물밑에서 정경유착(최순실 국정농단사건), 경영승계작업 등을 추진했다.

법원 선고, 삼성에 나쁜 영향 끼칠까

이 부회장이 검찰의 타깃이 되자 삼성은 ‘컨트롤타워 해체’ ‘계열사 자율경영 강화’ 등의 경영쇄신안을 쏟아냈다. 하지만 삼성이 진짜 변신을 꾀할지는 알 수 없다. 2008년에도 똑같은 혁신을 쏟아냈지만 말짱 도루묵이었기 때문이다.

 

더 흥미로운 건 삼성그룹과 오너의 역학관계다. 재계는 삼성의 오너가 공격을 받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묘사한다. 미디어들도 “오너 공백이 우려된다”는 분석을 쏟아낸다. 그런데, 2008년 이 전 회장이 경영일선에서 빠져있을 때 삼성그룹은 ‘실적파티’를 벌였다.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의 공백에도 올해 2분기 매출 61조원, 영업이익 14조700억원의 실적을 기록했다. 영업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8조1400억원)보다 72.9%나 늘었다. 종전 최고치였던 2013년 3분기 10조1600억원을 크게 넘어선 수치다. 23.06%의 영업이익률도 사상 최대다. 오너가 있든 없든 삼성그룹의 시계는 잘 돌아갔다는 얘기다. 이 부회장에 대한 재판부의 중형을 오너 공백으로 이을 필요가 없는 이유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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