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 세컨드 라이프 ➎ 김미정 하모니 코치

오십까지 전업주부로 살았던 김미정(60) 하모니 코치는 마흔넷에 일본어능력시험 1급 자격증을 딸 때 앞치마 두르고 청소기를 돌리면서 워크맨으로 듣기 시험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일본어 번역을 해볼까 했죠.” 그는 뭔가 기여하고 싶어 인생 2막을 열었다고 했다. “고독하지 않고 눈물도 흘리지 않으면 성장도 없어요.”

여덟살 아이는 말이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어딘가 한 곳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러면서도 한번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자폐아. 아이는 그가 피아노를 치면 리듬에 맞춰 원을 그리며 돌았다. 천천히 치면 천천히, 빨리 치면 빨리. 음악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는 아이와 소리로 소통했다. 형광등을 바라보며 걷던 아이가 피아노를 치는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의 손을 만지더니 아이가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이, 잘하네. 잘했으니 안아 줘야지.” 아이는 한참을 안겨 있었다. 그에게 안기는 것을 좋아하는 듯했다. 음악치료 수업을 마치면 엄마와 함께 밖에서 기다리던 네살배기 동생이 뛰어 들어온다. 그의 품 안에 자석처럼 들러붙은 채 동생이 말했다. “선생님, 사랑해요. 내가 왜 선생님을 사랑하는 줄 알아요? 선생님이 우리 형을 사랑하니까요.”

음악치료사 출신인 김미정 코치는 “음악으로 소통하는 데는 말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음악은 같이 있으면 행복하고, 아플 때 위로해 주는 최고의 친구죠. 서울 사직동 한옥에 살던 초등학교 시절 마루에 있던 피아노를 치며 노래할 때부터 음악은 저에게 하루도 없어서는 안 될 세포 속 산소 같은 것이었어요.”

중학교 1학년 땐 기타를 사달라고 엄마를 졸랐다. 세시봉 가수들이 기타 치는 모습에 반했었다. 시집 오기 전 초등학교 교사였던 엄마는 악기를 하나 다루면 좋다고 말했었다.

“시험 잘 보면 사 줄 게.” 열심히 공부한 덕에 기타가 생겼다. 혼자서 코드를 익혔다. 절대음감이라 느낌으로 코드를 잡았다. 독학을 했지만 조옮김도 자유자재로 했다. 그는 지금 기타 실력이 거의 그때 실력이라고 말했다. 음악을 전공할 생각은 못했었다. 조신한 현모양처로 살고 싶었다.

결혼 후 서울 강변역 쪽에 살 땐 동네 주부들의 요청으로 노래교실을 열었다. 주부노래교실의 선구자 격이었는지도 모른다. ‘김미정의 강변카페’로 불렸다. 그 동네를 떠나기 전 출전한 주민가요대회에선 최성수의 ‘해후’를 불렀다. 대상은 놓쳤지만 1등을 했다.

▲ 김 코치는 "내 강의가 누군가에게 동기를 부여해 그 사람의 행동이 달라질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사진=김미정 코치 제공]

가끔 고3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하신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고운 치마 입고 예쁜 핀 꽂은 여자보다 뭔가 기여하는 사람이 돼야 안 되나?” 이화여대 보건관리학과를 나와 전업주부로 살던 그는 두 아들을 대학에 보낸 후 2007년 초 지천명(50)을 지난 나이에 음악치료사의 길에 들어섰다. 터닝포인트였다. 아니 인생 2막이 올랐다.

비전공자라는 자격지심에 움츠러드는 그를 대한음악치료학회장 김군자 교수는 “타고난 음악치료사”라고 격려했다. “그대는 뮤지컬의 프리마돈나를 했어야 할 여인이에요.” 그는 정신병동 입원자, 치매노인, 알코올의존증 환자 등 다양한 사람들에게 음악치료를 시도했다. 바닥만 내려다보던 정신병동의 나이 많은 할아버지는 “몇십년 만에 노래를 따라 불렀다”며 그에게 “이제 혼자서 흥얼거릴 수 있을 거 같다”고 말했다.

2008년 가을 어느 정신병원에 음악치료사 면접을 보러 갔을 때의 일이다. 젊은 원장이 그의 프로필을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음악 전공자가 아니시네요? 석ㆍ박사 학위도 없고…. 보기보다 나이도 많으시네요.”

그의 아킬레스건을 순식간에 건드린 것이다. 교수의 추천을 받고 간 병원이었다. 원장이 잠깐 자리를 비운 새 그는 다른 문을 통해 빠져나왔다. 간호사에게 “아직은 역량이 부족한 듯하다”고 전해달라고 말했다. 집까지 두 시간 동안 하염없이 걸었다. 눈물이 뺨으로 흘렀다. ‘그래 김미정, 네까짓 게 뭘 한다고. 음악치료는 무슨, 치매노인 봉사나 하고 살아.’

자포자기 상태는 길지 않았다. 광운대 사회복지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마흔넷에 일본어능력시험 1급에 합격한 그였다. 사회복지사와 더불어 평생교육사, 건강가정사, 청소년지도사 자격증을 땄다. 지난 봄엔 집에서 가까운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과정 1학기를 마쳤다.

그는 한국코치협회 전문코치다. 라이프 코칭을 하면서 강의를 병행한다. 감성 리더십이 주요 강의 콘텐트다. 2013년엔 한국강사협회가 뽑는 명강사로 선정됐다. 회사 생활을 하루도 한 일이 없지만 그는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강의와 코칭을 한다. “이렇다 할 스펙이 없는 주부 출신의 늦깎이 여성 강사로서 처음엔 많이 위축됐었고 쭈뼛거렸습니다. 그런 나에게 나도 모르는 잠재력이 있었습니다.”

음악치료 초짜 강사 시절엔 음악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자유로운 면도 있었다. 설사 잘 못해도 전공자인 데도 못한다 소리를 들을 일이 없었다. 음악을 전공한 음악치료사들에게 다양한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강의했을 땐 이들에게서 “전공자로서 오히려 부끄럽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음악치료가 환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뮤직 코칭’이라는 이름으로 음악과 접목한 강의를 시도했다. 음악에 붙은 치료라는 말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의식해서다.

컴퓨터 압축파일처럼 세컨드 라이프가 풀려나갔다. 파일 어딘가 내장돼 있던 끼와 흥도 분출했다. 어디에 가나 그는 긍정의 아이콘으로 통했다. 그는 자신의 강의가 누군가에게 동기를 부여해 그 사람의 행동이 달라질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의 아바타가 되고 싶다던 한 은퇴 공무원은 그에게서 세시간씩 개인 수업을 받아 경로당 음악 강사가 됐다.

지난 2월 그는 자전적 에세이집을 냈다. 「늦게 핀 미로美路에서」. 전업주부로서의 삶은 어쩌면 인생 2막을 모색하는 미로迷路였는지도 모른다. ‘하모니코치 음악치료사 김미정이 들려주는 마음듣기 소리읽기’라고 부제를 달았다. 이 책에 그는 열가지 버킷리스트를 실었다. 칠순에 액티브 시니어와 시니어를 위한 콘서트 열기, 미래의 두 며느리와 ‘고부 시스터즈’ 만들기가 들어 있다. 

해외에서 교포를 위한 힐링 콘서트 열기도 있다. 이미 지난해 여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교민들에게 두시간 강의를 했다. 강의 후 교민사회에서 아홉번의 식사 초대를 받았다.

“제가 기타 치는 모습, 저의 목소리만 떠올려도 힐링이 된다는 소리를 들을 때 행복해요. 걸어다닐 수 있는 한 활동할 겁니다.”
이필재 더스쿠프 인터뷰 대기자 stolee@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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