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소방관 이영직씨의 헌신

전직 소방관 이영직씨의 헌신은 아름다움을 넘어선다. [사진=오상민 작가]
전직 소방관 이영직씨의 헌신은 아름다움을 넘어선다. [사진=오상민 작가]

소방복을 벗을 때 약속했다. “내일도, 그 내일도 봉사하겠다.” 그로부터 5년,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가위를 든다. 경로당을 찾아가 ‘이발 봉사’를 하고, 독거노인을 돌본다. 폐지를 땀흘려 모아 판 돈으론 어려운 이를 남몰래 후원한다.

누군가는 “물적 여유가 많은 사람”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그는 숱한 곡절을 힘겹게 떼치면서도 ‘나눔의 씨앗’을 뿌리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더스쿠프(The SCOOP)와 천막사진관이 ‘가위손 소방관’ 이영직(64)씨를 만났다. 일곱번째 주인공이다.

# 1장. 가난, 꼬마의 아픔

빈농貧農의 아들, 7살짜리 꼬마. 이 작은 아이에겐 소원이 하나 있었다. 속내를 들키면 부끄러울 것 같아 꽁꽁 싸매놓은 희망사항이었다. 쌀밥, 그 하얗디하얀 밥을 먹는 거였다. 맨좁쌀로 지은 밥은 정말 싫었다.

‘조밥도 많이 먹으면 배가 부른다’지만… ‘안 먹으면 꿀밤 놓는다’는 엄마의 으름장에 살이 떨리긴 했지만…. 7살 꼬마는 싫은 건 싫었다. 이유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이내 푹 꺼지는 배 때문이었다. 쪼그라들어 볼품없는 배를 물로 채우는 일도 힘겨웠다. 꼬마는 ‘가난의 아픔’을 온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이영직씨는 아무리 힘들어도 인상을 쓰지 않는다. 그의 넉넉한 웃음은 약자를 위한 배려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영직씨는 아무리 힘들어도 인상을 쓰지 않는다. 그의 넉넉한 웃음은 약자를 위한 배려다. [사진=오상민 작가]

# 2장. 아버지와 바리캉

팔남매 중 여섯째. 꼬마는 1953년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말 못할 이유로 고향(안동)을 떠나 낯선 곳(경북 영양)에 터전을 닦은 아버지는 가난했고, 야속하게도 ‘빈貧의 씨앗’이 대물림됐다.

그렇다고 ‘불행의 열매’가 열린 건 아니었다. 가난은 팔남매에게 ‘나눔’을 가르쳤다. 조밥을 그리 싫어했던 꼬마는 어쩌다 쌀밥이 나와도 동생들에게 양보했다. 주린 배에 물을 들이부으면 그만이었다. 꼬마의 형도, 그 형의 형도, 그 형의 누나도 그랬다.

아버지는 가난에 짓눌렸지만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정情도, 재기才氣도 넘쳤다. 손재주가 유별나 ‘뚝딱뚝딱’ 못 만드는 게 없었다. 특히 가위질을 참 잘했다. 언젠가부턴 ‘바리캉’을 들고 나타나 팔남매만의 ‘이발사’를 자처했다. 소박한 집의 마당에 낡은 의자가 놓이고 보자기가 펼쳐지면 웃음꽃이 피었다.

7살짜리 꼬마는 보자기를 뒤집어쓰는 걸 유독 좋아했다. 아버지에게 장난을 맘껏 걸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날이 무뎌진 바리캉’으로 꼬마의 머리를 살짝살짝 뜯어내는 걸로 화답했다.

“가만히 있으라 그랬잖아.” “아파요, 아파요. 아버지, 하하!” 꼬마에게 ‘이발’은 정이자 사랑이었다. 아니, 아버지였다. 꼬마가 훌쩍 성장해 어른이 됐을 때도 그랬다. 운명이었다.

각종 이발도구가 빼곡히 차있는 이영직씨의 ‘사랑의 이발함’. 전기가 없는 곳을 대비해 충전된 전자 이발기를 최소 5개 이상 가지고 다닌다. 요즘은 보기 힘든 바리캉이 흥미롭다. [사진=오상민 작가]
각종 이발도구가 빼곡히 차있는 이영직씨의 ‘사랑의 이발함’. 전기가 없는 곳을 대비해 충전된 전자 이발기를 최소 5개 이상 가지고 다닌다. 요즘은 보기 힘든 바리캉이 흥미롭다. [사진=오상민 작가]

# 3장. 가위손 소방관

7살짜리 꼬마는 훗날 소방관이 됐다. 40세가 되던 1992년, 18년이나 근속했던 대기업을 떠나 ‘불구덩이’에 몸을 던졌다. 힘 없는 자, 약한 자, 아픈 자를 돕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헌신의 또 다른 도구는 가위와 바리캉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약자弱子를 찾아가 ‘이발 봉사’를 했다.

7살 꼬마의 밤송이 같은 머리카락을 깎아주던 아버지처럼 ‘정’을 쏟았다. 전직 강남소방서 소방관 이영직씨는 그렇게 ‘착한 가위손’이 됐다. 대가를 원한 것도, 응답을 바란 것도 아니었다. 2012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받은 상이라곤 나눔문화재단의 나눔대상(2012년ㆍ서담상)이 유일했지만 그는 헌신을 멈추지 않았다.

철만 되면 불쑥 나타나 원치도 않는 약자의 손을 마구 잡아대고, 등 떠밀려 기부 한번 해놓고 착한 척 하느라 바쁜 ‘높으신 양반들’이 귀담아들을 만한 얘기다.

‘딱히 알아주는 이도 없을텐데, 감정 소비가 많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미소를 머금으면서 입을 열었다. “사회적 약자는 이웃 아닌가요? 이웃을 돕는 데 감정 소비라니요. 사실 약자들을 보면 심장이 아파요. 어린 시절에 고생을 참 많이 했거든요.”

이씨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경북 봉화역에 우두커니 서있는 16살짜리 소년이 보였다. 1968년 2월 칼바람이 매섭게 불던 날이었다.

이영직씨는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40세에 소방관에 도전했다. 그에게 가위와 바리캉은 좋은 헌신 도구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영직씨는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40세에 소방관에 도전했다. 그에게 가위와 바리캉은 좋은 헌신 도구다. [사진=오상민 작가]

# 4장. 소년과 태백행 열차

아버지를 좋아하던 7살 꼬마는 16살 소년이 됐다. 팔남매는 뿔뿔이 흩어졌다. 억세고 질긴 가난 탓이었다. 큰 형은 광산으로, 큰누나는 강원도로 돈을 벌기 위해 떠났다. 소년도 학교보단 고추밭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소년은 께끄름했다. 형들이, 누나들이 “영직아, 괜찮아”라면서 연신 토닥거렸지만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떼칠 수 없었다.

소년은 큰 형이 있는 ‘광산’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1968년 2월 새벽, 그가 경북 봉화역에 우두커니 서있었던 이유다. 광산으로 가는 ‘태백행 열차’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날따라 어둠이 진했다. 찬바람은 그의 얇은 옷을 파고들었다. 별이 아름답게 쏟아졌지만 소년은 눈길을 줄 여유조차 없었다. 낭만은 사치였고, 두려움은 현실이었다. 광산이 있는 태백까진 자그마치 12시간이 걸리는데, 무서움을 떨치기엔 소년의 나이가 너무 어렸다.

인터뷰를 마치고 걸어가는 이영직씨의 뒷모습. 40년 전 생계를 위해 경북 봉화에서 태백으로 홀로 떠났던 소년은 이웃을 진심으로 돌보는 큰 사람이 됐다. [사진=오상민 작가]
인터뷰를 마치고 걸어가는 이영직씨의 뒷모습. 40년 전 생계를 위해 경북 봉화에서 태백으로 홀로 떠났던 소년은 이웃을 진심으로 돌보는 큰 사람이 됐다. [사진=오상민 작가]

“빵~” 태백행 열차가 경적 소리를 꼬리에 매달고 들어왔다. 소년은 홀로 기차에 올랐다. 포근한 아침 햇볕이 창가에 드리웠지만 눈을 붙일 수 없었다. “큰형이 나올까? 역을 놓치진 않을까? 엄마가 형에게 주라고 싸준 된장을 잃어버리진 않을까?” 숱한 걱정과 상념이 그의 머리를 때렸다.

12시간 후, 소년은 태백역에 도착했다. 경북 봉화와는 다른 추위가 엉켜들어왔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낯선 땅의 첫 인사를 온몸으로 받을 무렵,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직아! 영직아!”

이상했다. 분명 큰형의 목소리였는데, 형이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뒤엉킨 머리에 ‘검은 탄炭’을 뒤집어쓴 낯선 사람이 뛰어오고 있을 뿐이었다.

“형?”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 때문이 아니었다. 형의 초라해진 모습 때문이었다. “형! 머리는 그게 뭐예요?” 16살 소년은 아버지를 떠올렸다. 슬픈 감정이 가슴을 때렸다.

일원동 대청경로당 신발장에 늘어놓은 이발도구. 이영직씨가 가는 곳은 어디든 이발소로 변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일원동 대청경로당 신발장에 늘어놓은 이발도구. 이영직씨가 가는 곳은 어디든 이발소로 변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 5장. 소년, 인생을 참다

갱도坑道는 어둡고 추웠다. 수시로 들려오는 폭발음은 ‘공포’를 불렀다. ‘이러다 갱도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공포감이었다. 16살 소년은 막장(갱도의 막다른 곳)까진 가지 못했다. 객기만으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신 소년은 갱도에 들어가는 ‘나무’를 나르는 일을 맡았다. 트럭에 나무를 실어 광산으로 운반하는 일이었는데, 그의 역할은 ‘운전수 조수’였다.

새벽에는 차량을 정비하고, 밤에는 광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안내했다. 그러다 짬이 나면 큰형과 광부들의 머리카락을 깎아줬다.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이발 기술 덕분이었다.

고된 일상이었지만 소년은 맨손과 맨발로 이겨냈다. 꿈에 그리던 ‘강원도 운전면허증’을 딴 20세에는 조수 딱지를 떼고 어엿한 운전수가 됐다. 강원도에 “심성 착하고 일 잘하는 녀석이 있다”는 입소문이 돈 것도 그 즈음이다.

소방차를 점검하고 있는 이영직씨. [사진=오상민 작가]
소방차를 점검하고 있는 이영직씨. [사진=오상민 작가]

우연인지 필연인지 ‘천운天運’까지 그를 찾아왔다. 1975년 대기업(크라운제과) 원주지사에서 그에게 ‘유통 및 인력 관리’를 요청했다. 과자ㆍ우유 등을 배달하고, 지사 직원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꿈인가 생신가 했어요. 요령 피우지 않고 앞만 보고 달린 게 알찬 열매로 이어진 것 같아요. 그 때문인지 서울 본사(총무)에서도 일을 할 수 있었죠.”

# 6장 저 언덕만 넘으면 …


곡절曲折, 구불구불 꺾인 상태.

누구의 인생인들 곡절이 없겠는가. 때론 앞이 보이지 않고, 때론 길이 열리지 않는 게 인생이다. 하지만 구불구불한 언덕만 잘 넘어서면 평지가 나오는 게 자연의 섭리다. 인생은 ‘고됨’을 참고 배기는 자의 몫이다.

이씨가 산증인이다. 곡절을 힘겹게 넘기자 달달한 행복이 찾아왔다. 예쁜 아내를 만났고, 토끼 같은 자식을 얻었다. “돈이 없어서 쌀밥을 먹지 못했던 제가 행복한 가정을 꾸렸으니, 천운을 누린 셈이죠. 그래서 사회를 위해 뭔가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행복은 나눠야 두배가 되니까요.”

소소한 봉사를 시작했다. 집 근처(경기도 안양)에 굴러다니는 폐지를 일일이 수거했다. 이를 정성스럽게 모아놨다가 팔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쌈짓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따금 경로당을 찾아가 청소ㆍ목욕 등 봉사활동도 했다.

이씨는 1986년 이발사 자격증을 땄다. 숱치는 기술은 프로이발사 못지 않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씨는 1986년 이발사 자격증을 땄다. 숱치는 기술은 프로이발사 못지 않다. [사진=오상민 작가]

그런데 참 이상했다. 가난의 굴레를 벗을수록 마음이 더 헛헛해졌다. 약한 아이를 보면 ‘조밥을 그토록 싫어했던’ 7살짜리 꼬마가 생각났다. 방황하는 소년과 조우하면 경북 봉화역에 우두커니 서있던 16살 아이가 떠올랐다.

힘 빠진 어르신을 만나면 머리카락을 잘라주던 아버지가 스쳤다. 대기업 근속 18년째. 이씨에겐 새로운 운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변곡점은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92년 8월께였다.

# 7장. 늦깎이 소방관의 탄생

“여보, 이거 보세요.” 조용한 성격의 아내가 그날따라 유난을 떨었다. “오늘 소방관 채용 공고가 났어요.” 채용공고가 나기 며칠 전이었다. 이씨는 아내에게 돌발 질문을 던졌다.

한 소방관이 사람을 구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본 직후였다. “언젠간 누군가를 돕는 일을 하고 싶은데, 소방관 어떨까?” 아내의 평소답지 않은 유난은 이 난데없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이영직씨는 2012년 소방복을 벗었지만 여전히 소방대원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영직씨는 2012년 소방복을 벗었지만 여전히 소방대원이다. [사진=오상민 작가]

주변 사람들이 한사코 뜯어말렸지만 이씨는 소방관에 도전했다. 험난한 과정이었다. 그해(1992년) 이씨의 나이는 40세. 필기와 실기를 모두 통과해야 했는데 머리도, 체력도 젊은이를 따라가기 벅찼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왔다. 180명에 달하는 지원자 중 이씨는 5등 안에 들었고, 강남소방서 119안전센터에 배속됐다. 월급이 3분의 1 토막 났지만 신바람이 절로 났다. 거짓말처럼 꿈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는 천생 소방관이었다. 격일제 근무는 그리 힘겹지 않았다.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비상대기→신고→출동’도 거뜬했다. 문제는 근무 다음날이었다. 초긴장 상태로 24시간을 버틴 다음날엔 ‘녹초’가 됐다. 자연스럽게 폐지를 줍는 일도, 경로당에 가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그래, 인간은 ‘자기 합리화’의 동물이다. 꿈과 현실이 멀어지면 ‘자기 변명’으로 간극을 메우려 든다. 어쩌면 이씨도 그랬을지 모른다. “어젯밤을 꼴딱 새웠으니까…” “내일 근무를 해야 하니까…”라는 변명이 약자를 위해 살겠다는 다짐을 갉아먹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1993년 7월 세차게 비가 쏟아지던 날, 이씨는 먹먹한 운명과 조우했다.

이영직씨는 쉬는 날이면 ‘사랑의 이발함’을 들고 봉사 활동을 나간다. 이씨가 강남 일원동 대청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의 머리를 다듬어 주고 있는 모습. [사진=오상민 작가]
이영직씨는 쉬는 날이면 ‘사랑의 이발함’을 들고 봉사 활동을 나간다. 이씨가 강남 일원동 대청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의 머리를 다듬어 주고 있는 모습. [사진=오상민 작가]

# 8장. 비 그리고 悲

루이스, 네이선, 오펠리아, 퍼시…. 1993년 7월. 그리도 많은 태풍이 서울을 매몰차게 할퀴었다. 서울 강남구 세곡동 대모산 끝자락에 힘겹게 터전을 일궜던 ‘참빛장애인교회’에도 수마水魔가 내려앉았다.

참혹했다. 330㎡(약 100평)의 낡은 비닐하우스는 힘없이 무너졌고, 배수로는 물에 잠겼다. 70여명의 중증 장애인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매트리스 등 세간살이가 온통 비에 젖었기 때문이었다. 장애인들의 얼굴엔 ‘비’가 내렸고, 마음엔 ‘비悲’가 스쳤다.

강남소방서에 전화가 걸려온 건 그날 새벽이었다. “따르릉! 따르릉!” 수화기 너머에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축대가 무너졌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소방관 20여명이 지원을 나갔다. 그중엔 신참 소방관 이씨도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현장은 비참하고 끔찍했다. 중증 장애인들의 몸과 마음엔 고난의 흔적이 역력했다. 대체 언제 깎았는지 머리카락은 엉겨붙어 있었다.

순간 ‘검은 얼굴’을 하고 손짓하던 큰 형이 떠올랐다. 가슴이 까맣게 탔다. 이씨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땀을 흘렸다. 매트리스를 말리고, 축대를 세웠다. 꽉 막혀 있던 배수로도 온 힘을 다해 뚫었다.

그렇게 10시간, 땀을 비오듯 흘리는 그에게 중증 장애인 소녀가 다가왔다. “정말 고~고~맙습니다.” 어눌한 소녀의 말, 이씨의 눈자위가 붉어졌다. ‘왜 이발도구를 챙겨오지 않았는지’라는 후회가 싸늘하게 밀려왔다.

이씨가 소방관 재직 시절 직접 만든 ‘119 사랑의 이발함’. [사진=이영직 제공]
이씨가 소방관 재직 시절 직접 만든 ‘119 사랑의 이발함’. [사진=이영직 제공]

# 9장. 약자에게 진심 바치다

“그렇다. 격무激務는 ‘변명거리’가 아니다. 진심만 있으면 격무 따윈 떼칠 수 있다.” 그는 진정성을 곱씹었다. 약자의 무거운 고통을 진심으로 분담키로 다시 한번 맘먹었다. 가장 먼저 ‘119 사랑의 이발함’을 만들었다.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가위ㆍ바리캉ㆍ스펀지 등 이발도구를 가득 넣었다.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면 언제든 이발함을 꺼내들었다. 서울이든 지방이든 경로당이든 장애인단체든 장소도 개의치 않았다. 참빛장애인교회, 은혜의 동산 등 중증 장애인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면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혼자 일어설 수 없는 중증 장애인 앞에선 무릎을 꿇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을 위해선 서슴없이 다리를 내줬다. 말을 못하는 사람들의 한恨은 마음으로 헤아렸다.

동네 곳곳에 널브러진 폐지도 다시 수집했다. 땀흘려 모아서 팔아봤자 연 40만~50만원을 후원하는 데 그쳤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작은 것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돕기 위해 돕는 게 아니라 마음을 나누고 싶었죠. 누군가는 연 50만원 기부하려고 그렇게 땀을 흘리느냐고 핀잔을 줄지 몰라요. 전 부끄럽지 않아요. 진심이니까요.”

# 10장. 아름다운 인생 2막

이씨는 지금 인생극장 ‘2막’을 살고 있다. 2012년 6월 30일 소방복을 벗었지만(정년퇴직) 여전히 ‘소방대원’이다. 2014년 6월 말 많고 탈 많던 롯데월드타워 소방대에 자원했고, 발탁됐다.

평생 지지자인 아내마저 내심 만류했지만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 또한 사회를 위한 봉사라 믿었기 때문이다. “자그마치 123층이잖아요. 그런 마천루摩天樓를 안전하게 지키려면 저 같은 경험 많은 소방대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영직씨가 소방교육을 하는 모습. 그는 “예방이 화재를 막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영직씨가 소방교육을 하는 모습. 그는 “예방이 화재를 막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영직씨는 소방차 점검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는 이를 ‘사명감’이라고 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영직씨는 소방차 점검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는 이를 ‘사명감’이라고 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롯데월드몰 소방대는 롯데월드몰과 롯데월드타워를 지킨다. 소방전문인력만 12명. 국내 대형몰 중 유일하게 자체 소방차(2대)를 갖추고 있다. 연기·열 감지기는 약 2만7000개에 이른다. 여기에서 ‘이상 시그널’이 포착되면 이씨를 비롯한 소방전문인력들이 비상출동한다.

근무 시스템은 ‘주야비晝夜非 3교대’로 녹록지 않지만 이씨는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를 ‘무거운 사명감’이라고 말했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1994년), 삼풍백화점이 붕괴했을 때(1995년), 우연히 현장에 있었어요. 그 아비규환의 현장 속에서 저는 통곡 외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죠. 그때 다짐했어요. 인재人災 앞에서 더이상 죄스럽지 말자구요.”

그의 ‘인생 2막’에서 여전한 건 또 있다. ‘사랑의 이발함’이다. 비번일 땐 경로당ㆍ장애인단체 등을 찾아가 이발 봉사를 한다. 정년퇴직 후에만 1000시간 넘게 이발을 했으니, 그의 깊은 진심을 엿볼 수 있다.

“정년퇴직한 이후에도 힘 닿는데까지 봉사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이제 5년밖에 안 됐어요. 그 약속을 지키는 건 제 숙명입니다.” 그가 숙명을 입에 담았다. 가난, 광산, 운전, 소방관…. 그의 쓰디쓴 인생이 스쳐지나갔다.

이영직씨의 2000~2015년 자원봉사 시간은 3700시간에 이른다. 분실한 자료까지 포함하면 1만 시간은 봉사에 할애했을 게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영직씨의 2000~2015년 자원봉사 시간은 3700시간에 이른다. 분실한 자료까지 포함하면 1만 시간은 봉사에 할애했을 게다. [사진=오상민 작가]

# 11장. 작은 이발소와 웃음꽃 

여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8월 14일 새벽 6시 30분 강남구 일원동 대청경로당. 전날 고된 근무를 마친 이씨가 여느때처럼 ‘사랑의 이발함’을 들고 나타났다. 경로당의 현관엔 ‘작은 이발소’가 세워졌다. 전깃불이 켜지고, 이씨가 ‘흰가운’을 입자 어르신들이 종종걸음을 놨다.

총무 오정숙 할머니는 “오늘은 여왕이 되는 날”이라면서 환하게 웃었다. 감사 박도수씨는 이렇게 말했다. “정년퇴임하고 5년 동안 한번도 빠진 적이 없어요. 우리에겐 정말 고마운 사람이죠.”

작은 이발소에 웃음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고향집의 작은 마당이 오버랩됐다. 팔남매가 깔깔거렸다. 가위를 든 아버지가 손짓했다. 7살짜리 꼬마가 빙긋이 웃었다.

글=이윤찬 더스쿠프 기자
chan4877@thescoop.co.kr

사진=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이영직씨가 근무하는 롯데월드몰 소방대 사무실. 근무 중에는 소방관으로, 근무가 끝나면 이발사로 변신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이영직씨가 근무하는 롯데월드몰 소방대 사무실. 근무 중에는 소방관으로, 근무가 끝나면 이발사로 변신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대청경로당에 만든 간이 이발소. 경로당 어르신들은 이발을 위한 전기시설을 직접 설치할 정도로 그를 반긴다. [사진=오상민 작가]
대청경로당에 만든 간이 이발소. 경로당 어르신들은 이발을 위한 전기시설을 직접 설치할 정도로 그를 반긴다. [사진=오상민 작가]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