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 앞에 무너진 선의

서울의 청년 주거빈곤 문제는 고질병이다. 서울시가 여러 비난에도 2030청년주택 정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는 이유다. 당장 시급한 일이니 민간이라도 끌어들여 청년들에게 주택을 주겠다는 선의善意다. 하지만 이 선의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30년 전 지어진 보람채 아파트가 그랬다.

▲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보람채 아파트는 매각이 결정됐다.[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서울시의 ‘역세권 2030청년주택’을 향한 시선이 차갑다. 종 상향, 용적률 향상, 각종 대출지원 등 민간 사업주에게 과도한 혜택을 주는 정책이라는 비판에서다. 임대료 상승을 제한할 묘책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럼에도 서울시는 이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정책의 핵심 기조인 ‘청년층의 주거빈곤 해소’를 위해서다.

서울시 관계자는 “민간을 끌어들인 건 공공이 부채를 늘리지 않고 청년층이 부담 가능한 임대주택을 확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면서 “‘청년층의 주거빈곤 해소’라는 선한 의지를 외면해서는 안된다”고 해명했다. 박원순 시장 역시 “청년은 우리 세대를 지탱하는 기반이자 우리가 지켜야 할 희망인 만큼 청년 주거문제 해결은 우리사회가 당면한 최우선적 과제”라고 사업의 당위성을 설명했다.

물론 시의 의도대로 사업이 진행되면 문제될 게 없다. 사업주의 무분별한 개발을 방지하고 저렴한 임대료로 공급할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면 이 정책이 공공 임대주택 사업의 롤모델로 남을 수도 있다.

그런데 시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이태경 토지정의연대 사무총장의 말을 들어보자. “도시가 팽창할수록 오르는 게 있다. 바로 땅값이다. 이때부터 땅 소유주들은 효율성을 따지기 시작한다. 땅값이 오른 만큼 부지를 더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다. 기존 건물을 허물고 더 많은 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높은 건물을 올린다. 기업이나 땅 부자만 이러는 게 아니다. 공공도 마찬가지다.”

사실 청년층의 주거빈곤 문제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30년 전에도 서울시는 같은 고민을 했다. 1960년대 한국수출산업공단(구로공단) 조성 이후 일자리를 찾기 위해 상경하는 청년 노동자가 가파르게 늘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1986년 공단 인근 광명시에 미혼여성근로자임대아파트를 지었다.

이 아파트는 주거복지 정책 모범사례로 꼽힌다. 공공기관이 직접 공급했으며, 임대료도 6만~7만원 수준으로 파격적으로 저렴한데다 지원 타깃(서울시에 직장을 두고 급여가 150만원 이하, 만 26세 이하의 미혼여성)도 분명했다. 복지 측면에서 보면 2030청년주택보다 수준이 높다. 800여명이 살 수 있는 이 아파트가 30년간 치열한 입주경쟁을 벌였던 이유다.

 

하지만 이 아파트의 결말은 비극이었다. 2013년 10월. 서울시가 느닷없이 ‘신규입주자 신청 금지’ 공문을 내리면서다. 서울시는 “보람채아파트의 운영개선을 위한 방안을 마련 중에 있으며 원활한 개선 추진을 위한 방안이 공지되기 전까지 2013년 11월 신규계약 대상자부터 입주신청 및 신규계약ㆍ재계약이 유보됨을 알린다”고 통보했다. 당장 입주를 앞둔 여성 노동자들의 입주가 취소됐고 2년 계약에 2년 재계약이 가능한 것으로 알고 들어온 기존의 입주자들도 재계약 없이 집을 비웠다.

서울시의 일방적 철거

계약이 끝난 입주민들은 차근차근 아파트를 떠났고 2015년 9월부터 텅 빈 아파트로 남았다. 이 과정에서 입주민들의 의견 수렴은 없었다. 지방에서 올라운 저소득층 여성 노동자의 반대 목소리는 금세 묻혔다. 서울시 관계자는 “보람채 아파트의 본래 목적이 구로공단 생산직 여공을 위한 숙소였기 때문에 공단이 외곽으로 빠져나간 현재는 의미가 퇴색했다”면서 “30년이 넘은 아파트라 쾌적한 주거환경을 제공하지 못한 점도 철거를 결정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그럴듯한 설명이지만 시장의 시선은 달랐다. 2006년 지하철 7호선 철산역이 개통되면서 역세권을 중심으로 보람채 아파트 인근 부동산 가격이 크게 상승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현재 보람채 아파트 부지 매각을 준비 중이다. 2030청년주택이 주장하는 ‘청년층의 주거빈곤 해소를 위해 선택한 극약처방’이라는 선의도 언제도 무너질 수 있다는 얘기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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