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 만드는 중소업체의 애환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PB(Private Brand)는 유통업체와 중소 제조업체의 상생 모델이었다. 유통업체는 자기 브랜드를 가질 수 있어 좋고, 중소 제조업체는 판로를 확보하고 마케팅비를 줄일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유통업체 전체 매출 중 PB 매출이 30%에 가까워진 지금, 그 취지가 어긋나고 있다. 왜일까.

▲ 초창기 PB는 유통업체와 중소 제조업체들이 윈윈했지만, 지금은 많이 훼손됐다는 지적이다.[사진=아이클릭아트]

유통업체들이 PB 몸집 키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롯데마트ㆍ이마트ㆍ홈플러스의 PB(Private Brandㆍ유통업체 브랜드) 매출이 전체 매출의 약 30%를 차지할 정도로 PB 비중이 해마다 늘고 있다. 2006년만 해도 3사의 매출 중 PB 비중이 10%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폭발적인 성장세다.

대형마트뿐이랴. 편의점은 아기자기한 PB상품들로 넘쳐난다. 기업형슈퍼마켓(SSM), 백화점, 홈쇼핑 할 것 없이 PB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최근엔 쿠팡ㆍ티몬 등 온라인업체들까지 속속 PB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PB시장이 커지면서 ‘싼 게 비지떡’이라는 인식도 서서히 바뀌고 있다. 과거의 PB상품은 대부분 저렴한 가격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무조건 싼 것보다 ‘가성비’를 따지면서 유통업체들이 제품력을 갖춘 대기업 또는 중견 제조업체들에게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PB의 품질이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김상용 고려대(경영학) 교수는 “초창기 PB상품은 품질이 낮았던 게 사실”이라며 “PB시장 경쟁이 치열해지고 메이저 제조업체들이 시장에 뛰어들면서 PB의 품질력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문제는 메이저 제조업체들이 PB시장에 뛰어들면서 중소업체들이 설자리를 잃고 있다는 점이다. PB상품을 생산하는 중소업체들의 경쟁력이 예전만 못하다는 점도 문제다. 장류를 전문으로 생산하는 한 중소제조업체는 전체 매출의 10%를 대형마트 PB상품 제조에서 얻는다. 하지만 자신들이 만든 PB상품과 NB(National Brandㆍ제조업체 브랜드)상품이 한 진열대에서 경쟁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연출되고 있다.

마트에 나란히 진열돼 있는 쌈장의 경우 NB와 PB가 용기, 주원료 함량, 원산지까지 같다. 다른 거라곤 라벨뿐이다. 업체 측은 “같은 제품이 맞다”고 했다. 제조단가도 같다. 다만, 다른 유통채널에 납품하는 NB상품들보단 등급이 좀 낮다.

왜일까. 업체 측은 “PB상품이 있는 데선 도저히 가격으로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등급이 낮은 상품을 납품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같이 납품하다 보면 우리 브랜드와 우리가 만드는 PB상품 간에 간섭이 있을 순 있다. 하지만 중소업체 입장에선 대형마트에 입점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추가 입점으로 그걸 무마하는 거다.”

3~4년전 부터 유통업체 PB상품을 생산하고 있는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NB나 PB나 남는 게 없긴 마찬가지”라며 “오히려 PB상품 수익성이 더 좋을 때도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만 NB도 1+1 행사다 뭐다 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중소 제조업체의 이런 애로는 메이저 제조업체들이 본격적으로 PB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한 2012년 한 연구보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지식경제부(현 산업통상자원부)가 의뢰한 ‘유통산업의 공생발전 및 경쟁촉진 방안’을 연구하던 연구진은 대형유통업체 PB를 생산하는 제조업체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향후 PB상품을 제조할 의향이 있는가?” 답은 모두 “없음”이었다. 실적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고 NB(Na tional Brandㆍ제조업체 브랜드)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게 이유였다.

경쟁 떡고물 유통업체에만…

몇가지 예를 보자 대형마트의 지속적인 요청으로 A사는 NB상품을 살짝 변형해 PB를 생산했다. 하지만 B사의 NB와 대형마트의 PB가 동시에 진열되며 NB상품이 잠식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요구하지 않았던 납품단가 인하 요구도 이어졌다.

B사는 대형마트에 NB상품을 납품하면서 약 20%의 마진을 챙겨왔다. 하지만 PB상품을 제조하면서 마진율이 15% 미만으로 감소했다. 대형마트는 “PB상품 가격이 낮은 대신 마케팅비 등 원가를 줄일 수 있다”고 했지만 애초에 B사의 원가 중 마케팅비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그럴 여력도 없었다. B사는 점점 경영이 힘들어졌지만 PB 생산을 중단할 수 없었다. 상품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판로를 찾는 게 워낙 어려운 데다가 PB 생산을 거절했다가 닥쳐올 불이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상용 교수는 “제조업체 입장에선 NB를 팔아서 남는 장사를 하는 게 가장 좋지만 지금은 자기네 제품 대신 남의 제품을 만들어 납품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우려하면서도 그것이 온전히 유통업체만의 탓은 아니라고 꼬집었다. “유통업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PB가 많아졌지만 제조업체가 경쟁적으로 시장에 자발적으로 뛰어든 면도 있다. 그 경쟁에서 우위를 점치려고 유통업체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서 결국 그 떡고물이 유통업체에만 떨어지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 제조업체들도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도 여전히 중소제조업체들은 대형유통채널 입점을 희망한다. 당장 이익이 나지 않더라도 판로를 뚫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의미가 있어서다. 한 온라인 카페에는 “어떻게 해야 마트에 입점할 수 있나” “마진이 적더라도 일단 들어가고 싶다” 등의 글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온다. 피 튀기는 싸움이라도 한번 나가보고 싶다는 게 중소제조업체들이 처한 현실이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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