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後日譚

▲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잊어버린다고 고통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사진=쇼박스 제공]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동명의 소설(김영하 作)을 원작으로 한다. 하지만 소설과 영화는 엄연히 다르다. 재료는 같지만 표현하는 기호가 다르다. 감독은 ‘은희(김설현)’가 ‘병수(설경구)’를 찾아가는 것으로 소설의 열린 결말을 닫아버렸다.

영화가 원작보다 낫기는 쉽지 않다. 원작이 주는 느낌이 강할수록 더욱 그렇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이 원작보다 나은지는 독자와 관객이 판단할 문제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는 리뷰가 적잖이 보인다.

‘병수’는 세상에 불필요한 쓰레기들을 청소한다는 목적으로 오랜 세월 살인을 저질러온 인물이다. 그는 17년 전 연쇄살인을 그만두고 수의사로 평범한 삶을 살아오다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게 된다. 갈수록 흐려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병수는 일상을 녹음하고, 살인의 기억을 일기로 기록한다. 그러던 중 마을에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병주는 우연히 ‘태주(김남길)’와 마주친 순간, 그가 살인자임을 직감한다.

“살 빼는 것도 분장”이라고 말하는 설경구는 이번에 10살이나 많은 캐릭터를 소화하기 위해 10㎏ 이상 체중을 감량했다. 반면 태주 역의 김남길은 10㎏ 이상 찌워 평범한 경찰관과 섬뜩한 연쇄살인범이라는 두가지 캐릭터 사이를 줄타기 하듯 오갔다.

‘세븐데이즈’ ‘용의자’ 등 전작에서 스릴러와 액션에 남다른 감각을 뽐낸 원신연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병수의 혼란스러운 감정에 집중했다. 병수가 알츠하이머에 걸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과거 차량 전복사고 장면 역시 360도 회전하는 카메라를 직접 제작한 후 원신원컷(one scene-one cut)으로 촬영해 CG 없이 기억 속 살인 장면에 대한 몽타주를 사실감 있게 묘사했다. 현실과 망상 사이에서 과거 살인의 기억을 더듬는 회상 장면을 등장시켜 관객과 두뇌 게임을 펼친다.

누구에게나 지우고 싶은 기억은 있다. 하지만 지우고 싶은 기억,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잊어버린다고 고통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걸 잊기 위해 기억을 왜곡해 버리거나 과거를 거짓으로 덮어쓸 때도 있다.

병수는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에게 저항할 힘을 가졌는데도 아버지를 죽였다. 살인을 하지 않고서도 어머니와 누이를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그는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아버지를 죽인 병수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누이를 가슴에 묻고 산다. 과거와 현실을 이어주는 누이는 기억의 경계에서 병수와 함께 성장한다. 살인에 대한 변명이자 자기합리화였던 ‘누이’, 결국 살인을 통해 지켜주고 싶었던 누이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병수는 살인의 명분마저 잃어간다.

살인의 기억을 잊게 해달라는 누이의 기도가 이뤄진 순간, 병수는 삶의 기억을 잃어 가는 형벌을 받는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처럼 말이다.
권세령 더스쿠프 문화전문기자 christine@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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