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문재인 정부에게 필요한 것

▲ 문재인 대통령에게 필요한 건 관용이다.[사진=뉴시스]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년~기원전 44년)는 별로 고결한 인물이 아니었다. 화려한 여성편력과 막대한 빚, 동성애 등 흠이 많았다.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말과 함께 루비콘강을 건너 무력으로 권력을 쟁취한 그는 냉철하긴 했지만 냉혹하진 않았다.

내전을 끝낸 카이사르는 새 질서의 슬로건으로 ‘관용(클레멘티아)’을 내걸었다. 반대파를 처단하기 위한 ‘살생부’ 대신 기념은화에 클레멘티아를 새겨 넣었다. 반反카이사르파의 선봉이었던 카토는 항복 대신 자결을 선택하고 유언으로 자녀들을 카이사르에게 보낸다. 철천지원수에게 혈육을 맡긴 것을 보면 카이사르라는 인물의 그릇 크기를 가늠할 만하다. 카이사르는 카토의 혈육은 물론 적장 폼페이우스 가족까지 따뜻하게 보살피고, 자신을 반역자로 매도했던 집정관 마르켈루스의 귀국을 허용했다. 그는 자신이 관용을 베푼 사람들에 의해 암살을 당했지만 패자를 품는 그의 통 큰 리더십은 훗날 로마 중흥의 초석이 된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어찌된 일인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가슴에 켜켜이 묻어놓은 분노의 감정을 털어낸다고 좋은 날이 없다. 이명박 정권 초기에는 좌파 비리를 털어낸다며 전 정권 실세를 대상으로 수사를 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까지 초래했다. 박근혜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박근혜 정권 내내 해외 자원과 4대강 사업에 관련된 수사를 벌였다. 오죽했으면 “청와대에서 식사 초대할까봐 겁이 난다”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탄식이 흘러나왔을까.

지도층의 비리를 캐내고 바로 잡는 일은 마땅히 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인 의도와 사감私感이 개입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탄핵과 촛불민심에 힘입어 등장한 새 정권은 광장의 함성을 이어가야 하는 숙명을 갖고 태어났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데 분노가 자꾸 확대 재생산되고 있어 걱정이다.

국정원 블랙리스트와 댓글 사건은 박근혜 정권에서 관련 수사로 한직으로 밀려났던 윤석렬 서울지검장이 지휘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때 이명박 당시 대통령에게 “어디서 분향해”하고 고함친 백원우 전 의원은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임용됐다. 이 정부 들어 세워진 과거사 관련 TF는 셀 수 없이 많다. 전두환을 지나 박정희, 이승만 정권, 일제강점기 일도 손을 댄다. 잘못은 바로 잡아야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응징의 냄새가 짙게 배어있다.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관용에 인색해졌다. 내편 아니면 네편이고, 중도는 설 자리가 없다. 상대방을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무조건 틀렸다고 몰아세운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적폐세력이라는 주홍글씨와 함께 척결대상으로 매도한다. 과거를 뒤엎기만 하는 적폐청산 리더십으로는 희망이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014년 4월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반성은커녕 진보 정권 10년을 적폐로 싸잡아 비난하다 결국 부메랑을 맞았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김이수 전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임명동의안 부결 이후 국민의당에 “적폐세력”이라고 비난했다. 이제까지 협력해왔던 소수 야당이 반대표 한번 던졌다고 해서 “야합” “땡깡”이라고 하면서 “협치하라”고 하는 건 요청이 아니라 위협이다. 급기야는 이낙연 총리가 “문재인 정부의 가장 아쉬운 점 중 하나가 협치協治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총리는 현재의 정책이 미래의 결실로 이어지기 위한 협치(coalition)를 할 적절한 시점이 됐다는 메시지를 한국인에게 남겼다. 다당제가 자리 잡은 지금은 당리당략적인 정책논쟁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위해 정당들이 협력하는 게 한국의 ‘시대정신’이 됐다는 의미였다. 협치는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조율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선거 과정에서 안희정 충남지사가 “분노의 정치를 끝내야 한다”고 말하자 “불의에 대한 뜨거운 분노가 있어야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고 맞받아쳤다. 분노는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세력을 교체할 수는 있지만, 나라를 이끄는 혁신적인 리더십이 될 수 없다. 분노 대신 관용이 답이다.

문재인 정부에게 필요한 것은 루비콘강을 건너는 결단력과 용기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반대편을 끌어안는 넉넉함이다. “원한은 강물에 흘려보내고, 은혜는 바위에 새기라”는 말이 있다. 척결과 청산이 통치 목적이 되면 증오와 적대를 자극할 뿐 협력도, 조정도, 미래지향적인 공존도 어렵다. 정치는 종교재판이 아니다. 남을 탓하기 전에 내 안의 적폐부터 살펴볼 일이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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