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덩케르크(Dunkirk) ❶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Dunkirk2017)’는 ‘덩케르크 철수작전’이라는 실화를 다룬다. 세계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전투신은 찾아볼 수 없다. 자극적이지 않아 더 자극적이고, 잔인하지 않아 더 공포스럽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메멘토’ ‘인셉션’ ‘배트맨 다크나이트(시리즈)’ ‘인터스텔라’ 등을 연달아 흥행에 성공시켜 할리우드의 대표적 흥행사 반열에 오른 감독이다. 그의 전작들은 대개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상상력, 그리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거기에 탁월한 화면 전개까지 갖췄으니 가히 명장의 반열에 오를만 하다. 온갖 상상으로 화면을 가득 채우던 놀란 감독이 ‘덩케르크 철수작전’이라는 역사적 실화를 작품 소재로 선택했다는 사실은 다소 뜻밖이다.

역사적 사실에 놀란 감독 특유의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는 없어 보인다. 그가 ‘배트맨’을 재해석해 새로운 배트맨을 탄생시켰듯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재해석한 것도 아니다. 어찌 보면 가장 ‘놀란스럽지 못한’ 작품이 ‘덩케르크(Dunkirkㆍ2017)’인 셈이다. 

영화는 마치 협주곡 한 악장이 끝나기 전, 오케스트라의 다른 악기들이 모두 멈추고 정적 속에서 한 악기만이 독주를 이끌어가는 카덴차(Cadenza)를 접하는 느낌이다. 본래 카덴차가 악기의 기교를 마음껏 뽐내는 독주라면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는 아무런 기교없는 독특한 카덴차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정적 속에서의 기교 없는 카덴차의 울림은 더욱 깊은 듯하다. 
 
덩케르크는 분명 전쟁영화이지만 전투 장면이 없다. 미국의 문인 존 도스 파소스(John Dos Passos)는 “너무 강하거나 많은 자극은 사람이나 사회를 자극에 무감각해지게 하고, 자극에 무관심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는 자극적이지 않아 더욱 자극적이다. 전투장면이 없어 더욱 전쟁의 공포를 느끼게 한다.
 
▲ 영국군 토미는 독일군이 점령한 덩케르크를 벗어나기 위해 홀로 질주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영화는 독일군의 매복 공격에 전멸한 영국군 부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영국군 일등병 토미가 질주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는 덩케르크 해변에 철수를 위해 길게 줄 서있는 연합군 진영으로 필사적으로 탈출하려 한다. 지금 어느 건물의 독일군 조준경 속에 자신이 잡혀 있는지 알 수 없다. 유령도시처럼 텅 빈 덩케르크 시가지에 혼자 남아,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긴장감과 공포에 헐떡이며 뛴다.
 
그를 쫓는 독일군 병사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다만 그 집요한 시선만이 느껴질 뿐이다. 요란한 총격도 없다. 이따금 귀청을 때리는 독일군 저격병의 그것인 듯한 ‘일발’이 정적을 깬다. ‘필살의 일발’이기에 비오듯 퍼붓는 총탄보다 더욱 공포스럽다. 고성능 엽총으로 무장한 일군一群의 사냥꾼들에게 쫓기는 한마리 짐승같이 절박하다.
 
그러나 비장하거나 긴박한 흔하디 흔한 배경음악도 없다. 덩케르크의 음악을 맡은 영화음악의 귀재 한스 지머(Hans Zimmer)도 이 장면에서는 철저히 관객이 된다. 카덴차의 느낌이다. 협주곡 카덴짜는 독주자 한명 외에 지휘자도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모두 손을 놓은 채 관객이 된다.
 
오직 영국군 일등병 토미 혼자 도입부를 책임진다. 토미 역을 맡은 배우에겐 미안하지만, 그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무명 배우인 듯하다. 아마 공군 조종사 역을 맡은 톰 하디(Tom Hardy) 정도의 유명 배우가 토미 역을 맡았다면, 관객들도 그가 영화 도입부에 허망하게 죽지는 않으리라 예상하고 안심하고 볼 것이다. 하지만 ‘듣보잡’ 무명배우의 운명은 도무지 점치기 어려워 그의 운명에 긴장하게 만든다. 
 
‘무명’의 일등병 토미는 필사적인 달음박질 끝에 철수선을 기다리는 수십만의 연합군이 메우고 있는 덩케르크 해변에 안착하지만 상황이 나아진 것은 없다. 여전히 그의 목숨은 보장되지 않는다. 흥남부두에 도착했다고 월남越南이 보장된 것은 아니다. 토미는 여전히 생사기로에 놓여있다. 영혼이 반쯤 나간 듯한 모습의 병사들은 줄지어 선 채 말도 없다. 눈 앞에 펼쳐진 도버 해협 건너 영국 하늘만 응시할 뿐이다.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독일 전폭기에 대한 두려움만이 짓누른다. 기약없는 철수선에 입술이 타고 애가 마른다.
▲ 북한의 핵미사일 소식이 한국뿐만 아니라 주변국까지 공포에 떨게 하고 있다.[사진=뉴시스]
전쟁영화의 양념같은 병사들의 걸쭉하고 너절한 농담도 최소한 덩케르크에서는 실종된다. 분명 2차세계대전 전쟁영화이면서 전투장면이 없다. 단 한명의 독일병정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피가 튀고 사지 육신이 날아가는 전투장면보다 더 고통스러운 전쟁의 공포가 짓누른다. 독일 전폭기 편대가 날아든다면 몸을 피할 곳도 없는 해변에 집결한 딱한 속수무책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수십만 병사들의 공포만 가득하다. 
 
북한의 핵미사일 소식으로 하루도 편치 못한 요즘이다. 북한군 한명 보이지 않고 북한 전투기 한대도 보이지 않지만 죽음의 공포가 온나라를 짓누른다. 미친 미사일이 정말 서울 상공에 날아들면 아마도 수십, 수백만 국민이 숨을 곳도 피할 곳도 없이 속절없이 죽어갈 수밖에 없다. 덩케르크 해변에 집결한 수십만 연합군 병사들의 공포를 공감하게 된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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