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를 기회로 삼아라

왕서방은 고집이 대단하다. 성에 차지 않는 순간, 탐욕을 끊어버린다. 한국이라면 호들갑을 떨던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가 사드 논란 이후 종적을 감춘 건 왕서방의 기질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 기업과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이 중국시장에서 맥을 못 추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다. 올 상반기, 김과 라면의 대중對中 수출액이 크게 늘어났다. 원동력은 무엇일까.

▲ 틈새를 공략하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국내경제는 수출 호조와 투자 중심으로 내수가 완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하반기에는 수출과 투자가 상반기보다 다소 둔화되지만 소비가 완만한 회복세를 나타낼 것으로 보인다.” 지난 6월 산업연구원이 발표한 하반기 국내경제 전망이다. 연구원은 지난 연말에 비해 대외 여건이 빠르게 개선되고, 대내 불확실성이 완화된 데다 정책 기대감까지 더해져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당초 2.5%에서 2.8%로 상향조정한다고 발표했다.

이 전망은 얼마나 맞아떨어지고 있을까. 반은 맞고, 반은 글쎄다. 소비심리가 서서히 개선되고 수출이 회복세로 돌아서는 등 긍정적인 요인이 있지만 부정적인 요인도 상존한다. 한국경제는 여전히 숱한 대내외 악재와 대면하고 있다. 가계부채 부담은 늘어나고, 저출산ㆍ고령화로 노동생산성은 악화일로다. 한국생산성본부에 따르면 2015년 기준 우리나라 기업들의 노동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국 중 28위를 기록했다. 최하위 수준이다.

민간소비 역시 살아나지 않는데다 중국과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ㆍTHA AD) 이슈와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등 G2(미국ㆍ중국) 리스크까지 겹치면서 내우외환을 겪고 있다. 그 때문인지 경제상황을 가늠해볼 수 있는 지표들이 신통치 않다.

 

8월 기준 민간소비를 점칠 수 있는 소매판매는 전월 대비 1% 감소했다. 6월(1.3%)과 7월(0.1%)에 잠깐 증가세를 보이다가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소비심리와 수출경기가 회복되면서 민간소비 회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사드 리스크가 언제 어떻게 해소되는지에 따라 민간소비 증가율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분석했다. 올 초부터 본격적으로 국내경제를 흔들고 있는 사드 리스크가 국내 소비경기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얘기다.

투자도 위축됐다. 건설투자를 나타내는 건설기성액은 전월 대비 1.5% 감소했고, 설비투자도 0.3% 줄었다. 지난해 9월 이후 소비ㆍ건설투자ㆍ설비투자 모두 감소한 건 처음이다.

틈새 공략했더니…

게다가 미국은 우리나라를 겨냥해 무역장벽을 높이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한국은 인도와 함께 미국의 최대 수입규제국이 됐다. 미국은 한국을 상대로 총 31건의 수입규제를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12월까지만 해도 23건이었지만 점점 수입규제 수위를 강화해 수입규제국 1위인 인도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분야도 다양하다. 한국산 철강ㆍ금속 분야가 20건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화학ㆍ섬유ㆍ기계 분야로 확대되는 모양새다.

사드 리스크도 쉽사리 해소되지 않고 있다. 지난 4월 롯데그룹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중국의 사드 보복에 어떻게 대처하겠느냐”는 질문에 황각규 롯데그룹 경영혁신실장은 “시간이 약”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중국은 여전히 투자 단계인 만큼 계속 투자를 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그말을 한 지 채 반년이 지나기도 전에 롯데는 중국에서 백기를 들었다. 중국의 노골적인 보복 조치에 피해가 점점 커지자 중국 내 롯데마트 사업을 접기로 한 거다. 롯데에 시간은 약이 아닌 독으로 작용한 셈이다. 이는 어쩔 수 없다고 손 놓고 있기 보다는 어떻게든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교훈을 일깨워줬다. 

실제로 위기를 호기로 삼은 품목은 수없이 많다. 특히 꽁꽁 얼어붙었다는 중국 시장에서 활로를 개척하고 몸집을 불리며 영토를 넓히는 품목도 있다. 사례를 들어보자.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8월까지 대중 농림수산식품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7.1% 감소했다. 조제분유(-35. 6%), 비스킷(-48%), 전복(-98.8%)의 수출이 급감한 이유가 컸다. 하지만 김(46.2%)과 라면(45.7%)의 수출은 크게 늘어났다. 농림수산식품 전체 수출액 8억5620만 달러(9700억원) 중 3가지 품목의 비중은 17.4%(1억5040만 달러)에 이른다.

▲ 중국시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까다로운 소비자의 입맛을 사로잡은 김과 라면 수출이 크게 늘었다.[사진=뉴시스]
김은 중국 현지 작황이 부진한 걸 눈치 채고 ‘원료김(생김)’으로 승부를 건 게 통했다. 라면은 다양한 맛과 조리법으로 중국 젊은층을 계속 두드린 게 효과로 이어졌다. 전략을 잘 짜서 틈새를 공략하면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역으로 돌려보면 한미 FTA 재협상, 사드 보복, 북핵 리스크에 시달리고 있는 자동차ㆍ철강ㆍ유통ㆍ농업에도 기회는 있다. 자동차 산업은 가장 큰 시장인 중국과 미국에서 판매량이 줄어들면서 부진하다. 업계는 미국의 보호무역 기조, 중국의 사드 보복 등을 이유로 꼽지만 본질은 한국차의 시장 경쟁력이 줄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적극적인 인수ㆍ합병(M&A)과 대규모 투자에 나선다면 벌어진 격차를 다시 좁힐 수 있다.

기회 노리면 길은 열린다

철강 산업은 중국 내 산업 구조조정과 제품 가격 상승의 호기를 맞고 있지만 동시에 미국의 철강 수입규제라는 위기도 맞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규제가 사실상 중국을 겨냥한 것인 만큼 중국산과 품목이 겹치지 않으면 규제를 피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산 철강제품을 수입하는 업체와 공조할 수도 있다.

사드 이슈의 직격탄을 맞은 유통 산업도 다시 기회를 노릴 수 있다. 과도하게 키워온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중국에서 실패한 전략을 점검해 새로운 전략을 짜면 언제든 회복할 수 있다. 농업에서도 기회는 충분하다. 미국의 농산물 시장 전면 개방 요구는 분명 우리 농업에 큰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민감한 품목인 쌀을 제외하면 미국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한계치에 다다랐다는 분석이 많다. 내줄 건 내주면서 기존에 손해를 보던 품목의 재조정을 적극 요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위기를 위기로만 받아들일 게 아니라 새로운 기회로 노리면 충분히 길은 열릴 수 있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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