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 세컨드 라이프 ⑧

‘국민배우’ 이순재(83)씨는 “평생 크게 욕심을 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캐스팅을 둘러싸고 경쟁이 치열했을 때도 좋은 배역을 차지하려 거래를 시도한 적 없고 친한 사람이 연출을 맡으면 오히려 거리를 뒀죠. 인생살이에서 좀 손해 보는 거 괜찮습니다. 불이익도 봤지만 인간관계가 좋아지는 유익도 있죠.” 무욕의 자세가 어쩌면 그가 롱런한 진짜 비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이순재씨는 “연기에 정진해 원숙한 연기를 펼치면 정상은 밟지 못하더라도 평생 이 길을 갈 수 있다”고 말했다.[사진=뉴시스]

“60여년 연기 인생에서 정상에 서 본 적이 없다는 게 이 나이에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정상에 올랐다면 거기서 끝났을지도 모르죠. 늘 부족하다고 느꼈고 내 앞의 누군가를 따라가야 했어요.” 올해 여든셋 국내 최고령 현역 연기자인 이순재씨는 “연기란 끝이 없는 작업이고 그래서 해볼 만하고 보람도 있다”고 말했다. “항상 눈앞에 목표가 있었고 가야 할 길이 펼쳐져 있습니다.”

‘세일즈맨의 죽음’ 연극 무대는 지난해 연기인생 60주년 기념 공연을 포함해 네번 섰다. 국민배우 소리를 듣지만 “그렇게 불리는 여러 배우 중 한 사람일 뿐이고 여전히 정상의 연기자는 아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현역 최고령 연기자인 그는 명문 서울고를 거쳐 서울대 철학과를 나왔다. 그런 그가 시추에이션 드라마 ‘거침없이 하이킥’을 찍을 때 재미있는 설정이라는 이유로 ‘야동순재’로의 전락을 마다하지 않았다. 옛 TBC 전속 탤런트 시절엔 수사극 ‘형사수첩’에 범인으로 33회 출연하는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모두들 맡기를 꺼린 소녀강간치사 사건 범인 역도 했습니다. 범인 연기도 막상 해보면 재미있어요. 이미지가 실추될까봐 꺼리는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모름지기 배우는 망가져야 한다면 망가지는 직업입니다. 연기자는 다양한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어야죠.”

그는 최초의 일일 드라마(눈은 나리는데) 주인공이었고 최장수 일일 드라마(보통사람들)와 최고 시청률 일일 드라마(보고 또 보고)에 출연했다. 1982년 KBS 드라마 ‘풍운’에서 대원군 역을 맡았을 땐 만조백관 앞에서 4분간 사자후를 터뜨리려 담배를 끊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승호, 신영균, 최불암 등 체구가 큰 사람들이 대원군을 연기했어요. 하지만 대원군은 5척 단구였습니다. 마르고 풍채가 볼품없었죠.”

그의 키는 165㎝다. 술은 애초에 멀리했다. 그는 잘나가는 연기자 후배들에게 연극 예술 창조의 길을 권한다. “장동건처럼 비주얼이 좋은 배우는 부모의 좋은 유전자를 타고나야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기에 정진해 원숙한 연기를 펼치면 정상은 밟지 못하더라도 평생 이 길을 갈 수 있어요.”

‘대원군’ 연기 잘하려 담배 끊어

1980년대 초 TBC와 통폐합된 KBS 시절이었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주인공인 3부작 ‘코리아 환타지’에서 그가 안익태 역을 맡았다. 연출자의 주선으로 국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에게 지휘 동작을 배우러 갔다. 대중 예술 연기자를 무시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뒤돌아 나오면서 그가 한 마디 했다. “국내 지휘자 중 세계적인 수준의 지휘자가 있습니까? 안익태는 세계적인 지휘자입니다.”

여러 번 망가지는 연기를 했지만 그는 대한적십자사ㆍ서울시 등 지금까지 아홉개 기관의 홍보대사를 맡았다. 연기자에 대한 인식이 바뀐 덕이었다. “연기자의 이미지가 좋아져 홍보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거겠죠. 무보수지만 좋은 일이고 무엇보다 나를 필요로 한다니까 합니다. 과거엔, 특히 순수예술 하는 사람들의 괄시가 극심했어요.”

그는 14대 국회 민자당 소속 지역구 의원을 지냈다. 호남세가 강한 중랑갑에서 앞서 13대 때 700표 차로 낙선했지만 3800표 차로 설욕을 했다. 전체 후보 합동유세장에서 그는 청중들에게 현역 의원인 상대당 후보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달라고 말했다. “전국적으로 최고의 모범 선거구였습니다. 여야 간 협치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서울대 철학과에 들어갈 때 재수를 한 그는 첫 도전 때 정치학과를 지원했다고 한다. 대전 피난 시절이었다. “또 떨어지면 갈 데가 없어 철학과에 응시했죠. 전과할 생각을 했었는데 당시 서울대 철학과 교수들이 쟁쟁했고 유일하게 정교수가 다섯명인 학과라 마음을 돌렸습니다.” 

의원 시절 그는 ‘연예인’ 출신 정치인으로서 유일하게 본회의 정책질의를 했다. 연기자의 저작인접권을 보호하는 입법도 주도했다. 지금은 몇백억 원이 왔다갔다하는 엄청난 권리다. 그는 이른바 적폐 청산엔 두가지가 있다고 주장했다. 누적된 폐단을 없애는 게 적폐 청산이지만 정적을 폐족시키는 것도 적폐 청산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을 포용하고 용서하는 게 곧 정치입니다. 상대 진영의 옳은 주장은 수용해야 그래야 화합이 이뤄지죠. 단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재판이 끝나면 사면해야 합니다. 그럼 대통령 지지도가 올라갈 거예요. 이 정권이 끝날 때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은 사람의 30%가 지지로 돌아서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정치에 뿌리 깊은 보복의 유전자를 미래 세대에게 유전시키지 말아야죠. 이 후진적인 정치문화를 이 정권이 끝장내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우리 정치에 대해 국민이 자부심을 느끼도록 만들어야 돼요.”

▲ 이순재씨는 “박근혜 정권 중심 멤버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인데, 탄핵 전엔 대통령에게 반대하는 말도 못하고 이제 와 대통령 핑계들을 댄다”고 말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그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모교인 서울대 출신들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털어놓았다. “박근혜 정권 중심 멤버 대부분이 서울대 출신입니다. 탄핵 전엔 대통령에게 반대하는 말도 못하고 이제 와 대통령 핑계들을 댑니다. 자존심이 있다면 아닐 말로 ‘할복’하는 사람이라도 나와야죠.”

그는 보수지만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만들지 말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원칙을 지켜 3선 개헌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워싱턴 대통령처럼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의 만델라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14대 의원 임기를 마치고서 그는 현실 정치를 그만뒀다. 지역구에서 초대 중랑문화원장을 거쳐 중랑구 사회복지협의회장으로 있을 땐 기관장 판공비를 없앴다. “이게 전례가 돼 후임자들도 판공비에 손을 대지 않습니다. 정치할 때도 돈 한 푼 받은 일이 없어요.”

그는 정치를 접은 것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단으로 꼽았다. 정치를 왜 그만뒀을까? “두번 출마했을 땐 자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돈도 없었지만 8년간 너무 힘들었습니다. 여전히 하늘이 푸르르고 꽃은 아름다웠지만 미처 느끼지 못했죠. 어느 일요일엔 주례를 아홉번 섰습니다. 바쁘기도 했지만, 지역구에 불 나고 물난리 나면 다 내 책임 같았어요. 빨리 내 자리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세번째 도전해 낙선했다면 한동안 정치판을 기웃거렸을 겁니다."

그는 좌우명으로는 두가지를 꼽았다. “좀 양보하며 살자”와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자.” 젊은 날 그는 영화 열편을 동시에 촬영한 적도 있다고 말했다. 하루에 두세 작품에 출연하느라 한 달에 20일을 밤낮 없이 일했다. 출연료가 형편없던 시절 그렇게 일해 집을 장만했고 건평 230㎡(약 70평)짜리 집을 지어 부모를 부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생전에 “연기도 일류가 되면 밥은 먹지 않겠느냐”고 했었다. 어머니는 96세에 영면했다.

이대 무용과 출신 부인은 한때 만두가게를 차려 수입을 보탰다. 아이 돌반지를 팔아 차린 ‘코끼리만두’는 한때 여러 대학가로 뻗어갔고 프랜차이즈화했다면 꽤 돈을 벌었을 거라고 귀띔했다. 그는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여건이 허락하면 평생 종사한 일에서 얻은 노하우를 재활용해 자원봉사를 해 보라고 권했다. 그의 버킷 리스트는 무엇일까? “무대에서 연기하다 쓰러져 이승을 떠나는 게 배우로서의 바람입니다.”

이필재 더스쿠프 인터뷰 대기자 stolee@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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