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 위기 탈출하려면 …

“농산물 시장이 완전 개방되면 우리나라 농업 전체가 휘청일 수 있다.” 국내 농가가 불안감에 휩싸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안을 놓고 농산물 관세 철폐가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어차피 내줄 수밖에 없다면 그에 걸맞은 이득을 취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 농산물 관세가 철폐될 경우 대미 무역적자 수지가 더욱 커질 공산이 크다.[사진=뉴시스]

“농산물 시장을 전면 개방하라.” 지난 8월 22일 열렸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공동위원회 1차 특별회기에서 미국의 무역대표부(USTR)가 요구한 것으로 알려진 내용이다. 사실이라면 함의含意가 있다. 미국 측이 우리나라가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 산업 중 하나가 농업이라는 점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한미 FTA 재협상안을 놓고 만난 첫번째 자리에서 농산물 시장 개방을 요구안으로 꺼내들었다면 “한미 FTA 개정을 통해 확실한 이익을 챙겨가겠다”는 시그널을 직접적으로 전달한 것이나 다름없다. 실제 요구 사항도 과감하다. 미국 무역 전문지 인사이드 US 트레이드에 따르면 USTR은 ▲한국이 단계적으로 철폐하기로 한 미국산 농산물 관세를 즉각 철폐할 것 ▲미국이 한국산 농산물에 부과하는 관세의 철폐기간을 연장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하는 요구안을 전달했다.

미국이 관세 철폐를 요구할 것으로 예상되는 농산품은 한국 내에서도 민감한 품목으로 꼽힌다. 한미 FTA 체결 당시 한국 정부는 587개 농산품을 즉시 개방하면서도(단계적 관세 철폐), 민감 품목 16개는 양허 대상에서 제외했다. 민감 품목 16개는 쌀ㆍ쌀가루ㆍ찹쌀ㆍ멥쌀 등이다. 우리나라 농업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품목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농산물 시장 전면 개방이 현실로 들어날 기미가 감지되자 농업계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한 농업 관계자는 “한미 FTA가 발효되면서 폐업한 농가가 수만곳에 달한다”면서 “농산품 관세가 전면 철폐되면 폐업하는 농가 수는 가파르게 늘 게 뻔하다”고 한탄했다.

실제로 한미 FTA 체결 당시 국내 농업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거라던 산업통상자원부의 주장과 현실은 달랐다. 무역통계진흥원에 따르면 2012년 한미 FTA 효력 발생 이후 증가하기 시작한 농업분야 대미對美 무역적자는 지난해 약 65억 달러(약 7조3600억원)로 불었다.

‘쌀 관세화’를 선언했음에도 쌀 의무수입을 지속하고 있는 점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2015년 농림축산식품부는 쌀 시장을 개방하는 대신 수입쌀에 513%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이전까지는 쌀 관세화 유예 조건으로 일정량의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했지만 쌀 시장을 개방하면 그럴 필요가 없어진다는 거다. 하지만 중국 등 주변국의 반발로 ‘513% 관세 협상’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쌀 양허되면 국내 농업 휘청


미국 역시 이점을 파고들 공산이 크다. 본격적으로 한미 FTA 재협상에 들어갈 시 쌀까지 건드릴 수 있다는 얘기다. 곽노성 동국대(국제통상학) 교수는 “농업 분야에서 가장 민감한 대목은 쌀”이라면서 “현재 양허에서 제외된 쌀의 경우 관세를 낮추거나 ‘최소시장접근물량 쿼터’를 늘려달라는 조건을 내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한미 FTA 개정으로 쌀까지 양허되면 일부 농가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농업 전체가 위기를 맞을 공산이 크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이유다. 문제는 미국이 농산물 관세 철폐 입장을 굽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안덕근 서울대(국제대학원) 교수는 “미국의 농산물 관세 철폐는 이미 예고가 돼 있는 카드”라면서 “자동차ㆍ철강 등 대부분의 분야에서 관세가 철폐된 상황이라 미국이 강력하게 주장할 수 있는 분야는 농산물 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미국이 농산물 시장 개방 카드를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할 거라는 분석도 나온다. 박형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은 “미국이 어떤 농산품의 관세 철폐를 요구하는지 큰 틀에서 바라봐야 한다”면서 “미국이 농업분야 관세 철폐 요구를 철회하는 대신 자동차의 관세 부활이나 군사무기구입 등 주장을 내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농업분야 무역수지에서 크게 흑자를 보고 있는 미국이 우리나라에 농산물 시장 개방을 압박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농업을 ‘딜 카드’ 쯤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을 타개할 비책은 없을까.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정부가 강경하게 대처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박형대 정책위원장은 “미국 정부에 따르지 않겠다는 강한 시그널을 보낼 필요가 있다”면서 “미국 정부의 입장과 다르게 미국 농업계에서는 한미 FTA를 손보는 걸 반대하는 분위기가 조성됐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때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미치광이 전략’에 맞불 작전을 놓아야 할 때도 있다”면서 “한미 FTA 폐기도 불사하겠다는 전략을 취하면 미국에서도 쉽게 압박하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과감한 맞불전략 필요

농산물 시장 개방을 정치적 협상카드로 사용하려는 미국의 전략을 역이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곽노성 교수는 “쌀을 제외하고는 미국이 농업을 통해 한국에서 취할 수 있는 이득은 거의 한계치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면서 “그렇다면 미국이 원하는 바를 일부 들어주면서 우리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것을 얻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정빈 서울대(농경제사회학) 교수의 의견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부 철폐 요구를 들어주면서 기존 양허 품목의 재조정을 적극 요구해야 한다. 가령, 미국이 크게 흑자를 보고 있는 소고기ㆍ돼지고기 등 축산물, 분유ㆍ치즈를 비롯한 유제품, 오렌지ㆍ체리와 같은 과일류의 관세율 재조정이나 자율관세할당(TRQ)의 허용물량을 축소하는 방법이 있다.” 줄 건 주고 얻을 건 얻으라는 얘기다.
고준영ㆍ임종찬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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