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재기가 쉽지 않은 이유

▲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옥중투쟁을 선언했다. 이 투쟁이 먹힐 가능성은 희박하다[사진=뉴시스]

제임스 스톡데일 미국 장군은 베트남 전쟁 중 무려 8년간 포로수용소에 갇혀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다. 가까스로 석방된 그는 수용소에서 가장 먼저 죽은 사람은 막연한 낙관주의자라고 회고했다.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갈 거라고, 부활절에는 풀려날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가 석방이 안 된 낙관론자들은 결국 상심한 나머지 생명을 끈을 놓고 말았다.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본 비관주의자들이 끝까지 살아남았다.

짐 콜린스는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라는 책에서 ‘스톡데일 패러독스(stockdale paradox)’라는 말을 소개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결국에는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냉혹한 현실을 차분하게 직시하며 최악의 사태에 대비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다.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독한 낙관론에 빠져있었다. 촛불집회가 광화문을 메워도 청와대를 둘러싸도 오불관언吾不關焉(어떤 일에 상관하지 않고 모른척함)이었다. 헌재가 탄핵심판을 내리기 전에 닉슨 미국 대통령처럼 자진사퇴를 했으면 지금처럼 참담한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텐데 너무 안일하게 대응했다. 탄핵기각 판결이 나면 축하이벤트용으로 5단 케이크를 준비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는 10월 16일 1차 구속시한이 끝나면 석방되리라고 내심 낙관했다고 한다. 새로 이사 간 서울 내곡동 집 마당에 심을 꽃과 벽지까지 일일이 챙겼다니 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옥중에서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와 일본 「대망」을 읽는다. 5부작인 「토지」는 만석군 집안의 주인이 교살되고 혼자 남은 딸 최서희가 갖은 고난 끝에 몰락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고향땅인 경남 하동군 평사리로 귀향하는 과정을 그렸다.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은 일본 전국시대의 권력자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삶과 흥망성쇄를 그린 소설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인고忍苦의 시간을 보낸 뒤 265년간 지속된 에도시대를 열었다. 두 소설은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이겨내겠다는 박 전 대통령의 결기를 대변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10월 16일 “정치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가 찍어졌으면 한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곧이어 유영하 변호사도 사임했고, 재판부가 선정하는 국선 변호인도 거부할 태세다. 구속기간 연장은 사실상 유죄판결을 예고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이제 법적 절차에 불복하고 정치적 투쟁을 선언한 셈이다. 그의 정치적 승부수는 성공할까.

결론부터 말해 그의 정치적 재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첫째, 정치는 타이밍의 예술인데 너무 늦었다. 재판이 80여 차례 진행된 지금은 야구로 말하면 9회말 투아웃에서 더 이상 경기를 못하겠다고 선언하는 꼴이다. 둘째, 친박 의원조차 고개를 돌릴 정도로 고립무원孤立無援이다. “정치보복을 중단하라”면서 단식투쟁 하는 조원진(대한애국당) 의원만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장세동 전 안기부장처럼 눈에 보일 뿐이다.

셋째, 정치는 명분을 선점해야 하는데 국민을 설득할 논리가 약하다. 국정농단과 촛불집회 탄핵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과 친박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박 전 대통령은 “억울하다. 모른다. 진실은 밝혀질 것이다”는 말을 고장난 레코드판처럼 틀었다. 재판 거부는 “사법적 절차를 존중해야 한다”는 자신의 과거 발언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문제는 낮은 시청률에도 ‘박의 전쟁’이 장기공연에 접어들 조짐이라는 점이다. 대구ㆍ경북 등 일부 텃밭지역에서는 ‘박근혜 마케팅’ 유혹이 여전하니 보수 분열은 더욱 심해질게 뻔하다. 그의 뒤늦은 출사표로 정치는 혼미한 안개정국으로 들어가고, 보수통합은 더 큰 난관을 맞게 될 전망이다. 5년 전 국민이 박근혜 당시 후보를 대통령으로 뽑았을 때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영국의 전성기를 연 엘리자베스 1세를 기대했는데 아버지가 이뤄놓은 ‘조국 근대화’라는 자산까지 갉아먹고 말았다. 한국 보수는 박근혜 시대에 저물기 시작했고 꽤 긴 시간 동면상태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정치는 생물이어서 예단할 수 없지만 이대로라면 당장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 보수가 고전할 것 같다. 문재인 정부가 잘해서라기보다는 야당인 보수 세력이 지리멸렬하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승부수는 물망초 꽃말처럼 “나를 잊지 말아요” 정도로 찻잔 속 태풍이 될지 정계개편의 신호탄이 될지 아무도 단언할 수 없다. 카드는 문재인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 쥐고 있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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