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덩케르크(Dunkirk) ❹

2차세계대전에서 처칠과 히틀러는 서로 다른 ‘영웅관’을 드러낸다. 처칠은 패잔병이나 다름 없는 덩케르크 철수 군인들을 ‘덩케르크 영웅’이라고 규정하고 치켜세웠다. 반면 히틀러는 용감한 독일시민과 병사들은 모두 ‘영웅적’으로 죽었다며, 전쟁 말미에 살아 남은 이들을 ‘쓰레기’로 규정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편집한 ‘덩케르크 철수작전’은 철수작전의 묘사보다 마지막 장면이 더욱 흥미롭다. 아마도 감독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인 듯하다. 프랑스 북부 작은 해안에 고립됐던 40만명의 연합군은 영국 국민이 합심한 필사적인 노력 끝에 ‘기적적’으로 영국으로 생환한다. 거의 몰살 직전에 몰렸던 40만 병력이 고작 3만여명의 희생자와 포로만 남기고 생환한 것은 처칠 총리의 평가대로 ‘덩케르크의 기적’이라 불릴만 했다.

생환한 병사들은 군용열차에 몸을 싣고 영국으로 돌아온다. 그들은 사실상 ‘덩케르크 전투’의 패잔병들이다. 패잔병들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환을 위해 어민들과 그들의 어선까지 총동원되었으니 민폐덩어리가 된 셈이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미성년ㆍ소년들까지 바다로 나서고, 숱한 민간인들까지 희생된다. 군용열차에 몸을 싣고 돌아오는 병사들은 패잔병답고 민폐덩어리답게 침묵 속에 민망하고 죄스럽다. 마치 죄수 수송열차같은 분위기다. 

그러나 열차가 역에 도착했을 때 시민들이 몰려나와 그들의 생환을 따뜻하게 맞이해주고 열광적으로 환호한다. 신문들은 그들을 ‘덩케르크의 영웅’이라고 규정해준다. 시민들의 환영과 신문 기사를 확인하는 병사들의 얼굴에 차츰 생기가 돌고 그들은 ‘쓰레기 패잔병’에서 차츰 ‘대영제국의 병사’로 다시 돌아간다. 아마도 이 순간에 이미 영국의 2차세계대전 승리는 예약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 덩케르크에 고립된 연합군을 구출하기 위해 영국 어민과 어선들이 총출동했다.[사진=더스쿠프포토]
만약 영국이 덩케르크에서 40만 병사의 태반을 잃었다면 독일과의 전쟁을 끌고나갈 동력을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37만의 병사가 생환했다고 해도 2차세계대전 초반 ‘패전’의 기운이 영국을 짓눌러 영국군과 국민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면 그 전쟁의 결과도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 처칠 총리는 ‘덩케르크 전투’의 황당하리만치 참담한 실패의 책임을 묻는 대신 생환한 ‘패잔병’들을 모두 ‘영웅’으로 칭송함으로써 명백한 ‘덩케르크 패전’을 ‘덩케르크 승전’으로 바꿔치기하는 데 성공한다.

2차세계대전의 막바지, 베를린이 연합군에게 함락되기 직전 베를린 방공호에 숨어 최후의 저항을 하던 히틀러는 베를린에 남은 시민들과 병사들을 대피시키자는 참모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한다. “용감한 독일시민과 독일병사들은 모두 영웅적으로 죽었다. 아직 살아남은 것들은 모두 쓰레기들일 뿐이다.”

처칠의 ‘영웅관’이 옳을까, 히틀러의 ‘영웅관’이 옳을까. 무릇 ‘영웅’이란 히틀러의 말대로 어마무시한 용맹성으로 뛰쳐나가 한명의 적이라도 더 죽이고 죽어버려야 하는 것일까. 처칠의 생각처럼 모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끝까지 살아남는게 영웅일까. ‘영웅(Hero)’의 그리스 어원은 ‘수호자(ProtectorㆍSafeguard)’다.

영웅은 자신의 집단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자일 뿐이다. 영웅이 되기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할 필요는 없다. 목숨까지 버렸다고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목숨을 버려도 집단을 지키지 못했다면 개죽음일 뿐이다. 살아남아도 집단을 끝까지 수호했다면 그것이 영웅이다.

중국 송나라 때 사방득謝枋得이 쓴 각빙서卻聘書라는 책에는 ‘강개부사이 종용취의난慷慨赴死易 從容就義難(분을 참지 못해 나아가 죽기는 쉬우나 조용히 뜻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아마도 진정한 영웅이란 용맹무쌍해서 아무데나 나아가 죽기보다는 조용히 뜻을 이루는 자일 것이다. 영국 병사들이 ‘덩케르크 전투’에서 비분강개해 뛰쳐나가 죽지 않고 살아남아 끝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면 그들은 영웅 칭호를 받아 마땅할 것 같다.
▲ 제자리에서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사람도 '영웅'이다.[사진=뉴시스]
영화 속에서 진정한 영웅의 모습을 보여주는 외로운 전투기 조종사 패리어(톰 하디)는 살아남는다. 독일군 전투기에 맞서 끝까지 철수선박을 보호하다, 연료가 고갈돼 독일군 점령지역에 불시착하고 포로로 잡힌다. 

일본 가미카제처럼 후련하게 적진에 비행기를 꼬라박는 ‘영웅적’ 모습을 보이지 않고 끝까지 차분하게 철수선 보호임무를 수행하고 조용히 적군의 포로가 된다. ‘영웅’이 되기 위해서 전투기에서 내려 권총으로 독일군 한명이라도 더 쏴 죽이고 나도 죽어야하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전쟁과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 ‘강개부사慷慨赴死’하는 사람들도 있고 강개부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시간들도 많다. 그러나 강개부사는 큰 의미 없다. ‘종용취의從容就義’하는 것이 이 시대의 진정한 영웅이다. 종용취의가 강개부사보다 어렵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 ‘영웅’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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