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보! 세컨드 라이프 ⑨ 구세진 동원복지재단 상임이사

진폐증 환자인 구세진(60) 동원복지재단 상임이사는 “광부 생활로 얻은 진폐증은 나에게 훈장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나라에서 훈장 받은 사람은 연금이 없지만 진폐증 진단을 받은 덕에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받는 만큼 장애연금을 받습니다.” 그는 진폐증 탓에 호흡이 가쁘지만 광부는 천직이었다고 말했다.

▲ 구세진 이사는 진폐증에 걸려 광부 일을 그만뒀다. 그가 진폐제도 개선을 촉구하는 이유다.[사진=동원복지재단 제공]

“마라톤이 막판 스퍼트가 중요하듯이 잘 죽으려면 인생 막바지를 잘 살아야 합니다. 잘 사는 게 곧 잘 죽는 비결이죠.” 구세진 동원복지재단 상임이사는 “하루하루를 엉터리로 살면서 ‘웰다잉’을 지향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마치 안 죽기라도 할 듯이 삽니다. 자신이 평생 건강할 줄 알죠.”

그의 카카오톡 상태 메시지는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자’이다. 구 이사는 광부 출신이다. 진폐증 진단을 받고 29년 8개월 만에 광부 일을 그만뒀다. 때마침 탄광도 문을 닫았다. 그의 명함엔 광부의 곡괭이를 배경으로 ‘나는 산업전사 광부였다’는 글귀가 박혀 있다.

그가 상임이사를 맡고 있는 재단 산하의 노인요양원 이름은 ‘탄광촌’이다. 원장인 그가 우겨서 붙인 이름이다. 이 이름에 대해 반발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지금은 이구동성으로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지 않아서 좋다”고들 한다고 말했다. “광산쟁이가 광부 출신이라는 걸 굳이 감출 이유가 있나요? 강의를 할 때면 청중에게 제가 진폐증 환자로 허리와 귀도 안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청중이 보는 데서 양쪽 귀 보청기를 빼 건전지를 갈기도 해요.”

청력이 안 좋은 건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는 광산 일을 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 10여년 전 형제들 명의의 땅까지 담보 잡혀 부동산에 투자했다 맞은 부도로 인한 스트레스의 영향이 더 컸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 하는데 갈잎을 먹으려 했던 거죠. 광부 일로 그때까지 번 돈에 은행 대출금까지 23억원을 날렸습니다. 지난 7월에야 개인 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져 면책을 받았습니다. 비로소 오랜 악몽에서 벗어난 거죠.”

부도 후 그는 삶의 의욕을 잃었었다. 한달 대출금 이자가 1500만원이나 됐다. 차를 달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보험금을 많이 탈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기도 했다. 정신과병원 입원을 거쳐 4년간 통원 치료를 받고서 마침내 자살 충동을 극복했다.

언젠가는 진폐증에 걸릴 거란 생각에 젊어서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딴 그는 그 후 아내의 권유로 함께 호스피스 자원봉사 교육을 받았다. “시한부 선고를 받고 6개월 안팎밖에 못 사는 사람들도 삶에 대한 애착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그때 강사에게서 들었습니다. 저야 젊고 사지도 멀쩡한데 재기해 보기로 마음먹었죠.”

▲ 구 이사는 “광부로 열심히 산 덕에 두 딸이 대학 등록금까지 지원받았다”고 말했다. 인생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달렸다.[사진=동원복지재단 제공]

출석하는 교회 목사의 권유를 받고 경로대학으로 눈을 돌렸다. 강원도 정선군에 여섯곳, 영월군에 두곳 등 모두 여덟개의 경로대학을 만들고 이들 지역을 비롯해 도내 4개 시군 경로대학연합회를 조직해 사무국장을 맡았다. 경로대학을 제대로 해보려 한림대 대학원에 진학해 노인복지를 전공하기도 했다. “공부해서 남 주나”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남 주려 시작한 공부라고 할까? “봉사도 막상 해 보니 뭘 알아야겠더라고요. 지식도 제대로 전달하려면 어설퍼서는 안 됩니다.”

남 주려 대학원 공부했다

그가 일하는 동원복지재단은 비영리재단법인으로 폐광 지역의 광산 근로자를 위한 활동을 벌인다. 그는 광산진폐권익연대 상임부회장도 맡고 있다. 진폐증 환자들은 조금만 걸어도 숨이 가쁘다. 그가 진폐증을 앓는 노인들과 어울리자 주변에서 기가 빠진다고 만류했다. “오히려 전보다 젊어졌다는 소리도 듣습니다. 강의를 하느라 열심히 웃는 연습을 한 덕도 있어요. 인상은 자기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맞아요. 요즘은 누가 연봉 1억 줄 테니 오라고 해도 응할 마음이 없어요.”

그는 많은 사람들이 결과를 중시하지만 삶은 과정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두 딸에게도 “미래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유보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고 했다. “과거 다들 어렵게 살던 시절엔 내일 잘 살겠다고 오늘 굶고는 했습니다. 저는 열심히 오늘을 사는 것이 곧 미래를 준비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하루 잘 살고 내일을 맞으면 지속적으로 인생을 잘 살 수 있어요.”

구 이사는 정선군 태생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입시에 합격했지만 입학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진학을 포기했다. 양화점에서 일을 배우면서 구두를 닦았고 새벽이면 신문을 돌렸다. 이듬해 중학교에 들어갔고 졸업 후 나이 열아홉에 탄광에 취직했다.

그후 17년 동안 열세번 직장을 옮겼다. 의협심이 강해 현장 사정에 어두운 윗사람들과 자주 부딪친 탓이었다. 서른일곱살, 광부가 된 지 18년 만에 중간관리자인 ‘항장’이 됐다. 동갑내기 아내가 기왕 갱도에 들어가는 거 한번 관리자가 돼 보라고 부추겨 국가기능시험을 본 덕분이었다. 자기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한 동향의 아내에 대해 그는 “친구로 만나 남 주기 아까워 결혼했다”며 웃었다. 내친김에 주경야독으로 방송통신고를 거쳐 늦깎이로 두 딸이 나온 삼척대를 졸업했다.

그는 “인생 2막은 더 이상 돈이 잣대가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서울에 나들이 가 동년배를 만나면 상당수가 돈 때문에 앓는 시늉을 한다고 했다. “집 한 채씩은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 나이에 돈을 벌려고 들어요. 내가 정년퇴직 전 연봉 1억을 받은 사람인데 그 절반은 받아야 된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이 나이에 그런 일자리는 없어요. 단적으로 은퇴한다는 건 더 이상 경제 활동을 못하는 거예요. 수입이 생기더라도 기본적으로 내 용돈이나 벌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웰다잉 등을 주제로 강의를 다니는 그는 처음 6년간 강의료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퇴직을 하면 상당수가 강의를 하고 싶어 합니다. 어쩌다 강사들 교육을 할 때면 자원봉사를 해보라고 말합니다. 재능 기부를 하면 평가를 받지 않지만 단돈 만원이라도 받으면 그땐 강의평가의 대상이 됩니다. 강사로서 미숙하다면 강의 기부로 시작해야 합니다.”

죽을 생각을 한 후로 그 자신 돈에 관한 한 마음을 비웠다. 봉사직인 동원복지재단 상임이사를 맡고나서도 판공비를 받지 않았다. 그러자 이사들이 전례가 된다며 되레 1년 후 판공비를 올려 줬다. “30년간 광부로서 남의 밑에서 봉급쟁이를 했습니다. 그렇게 일한 대가도, 일에 대한 평가의 잣대도 돈이었죠. 내가 좋아서 하는 봉사는 보람과 의미가 대가입니다. 고액 연봉에 비길 바 아니죠.”

어렵게 자랐지만 남을 돕는 건 성장기에 부모에게서 받은 영향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내일 아침 끼니가 없어도 오늘 지나가는 사람에게 밥을 먹였다고 말했다. 그런 부모에게 자신의 부부가 한 대로 지금 딸들이 하고 있다고 털어 놓았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게 있게 마련입니다. 세상엔 공짜가 없지만 거저 잃는 것도 없는 거 같아요. 삼성 같은 재벌들이 왜 빌 게이츠처럼 통 큰 기부를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이필재 더스쿠프 인터뷰 대기자 stolee@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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