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덩케르크(Dunkirk) ❺

독일군을 피해 덩케르크 해변가에 모여든 영국군 사이에 프랑스 병사 ‘깁스’가 숨어든다. 그는 죽은 영국 병사의 인식표를 훔쳐 영국군으로 위장하고, 탈출을 꾀하지만 결국 프랑스군임이 들통난다. 분명 같은 동맹군이지만 영국군은 깁스를 침몰하는 배에 묶어둔 채 탈출한다.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의 과거를 이해하고 정리하지 못해 벌어진 비극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덩케르크’는 제대로 된 화끈한 전투 장면 없는 기묘한 전쟁영화다. 스필버그 감독이 작심하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영상에 담아낸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포격과 화염, 섬광, 그리고 피로 물든 노르망디 해안가의 시체와 죽은 물고기들이 함께 파도에 휩쓸려 다니는 참상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전쟁의 끔찍함을 절실하게 전달한다. 전쟁의 참상을 절규하는 대신 속삭이듯 들려준다. 가끔은 귀청을 때리는 굉음에는 오히려 무감각해지만 들릴 듯 말 듯 한 속삭임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독일군에 밀려 프랑스 북북 덩케르크 해변에 몰린 영국군은 철수 수송선을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아줄처럼 기다린다. 크고 작은 어선에서 놀잇배까지 총동원된 눈물 겨운 ‘철수작전’을 시작한다. 사실 정교한 ‘작전’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각자도생各自圖生에 가깝다. 놀란 감독은 그 아수라장 속에서 알렉스(Alex), 토미(Tommy), 깁슨(Gibson)이라는 세명의 병사에게 앵글을 맞춘다.

이름만큼 평범하기 그지없는 앳된 병사들이다. 이들은 덩케르크 해안에 동원된 네덜란드의 낡고 조그마한 트롤 어선에 헤엄쳐 올라 만조滿潮 때를 기다린다. 운이 좋으면 조류가 그들을 코앞에 보이는 영국 해안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독일군 병사들이 이들이 몸을 숨긴 트롤 어선에 사격훈련을 한다. 낡은 배 여기저기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배에 물이 차오른다. 독일 병사들은 심심파적으로 돌을 던지지만 영국 ‘개구리’들은 죽을 지경이다.
▲ 영국군 인식표를 훔쳐 탈출대열에 합류한 프랑스군 깁스의 정체는 결국 들통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덩케르크 해변에서부터 함께 했던 세명의 ‘운명공동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점점 가라앉는 배의 무게를 줄여야한다. 알렉스는 느닷없이 말이 없는 깁슨을 독일군 스파이로 의심하고 결박하고 바다로 내치려 한다. 만조가 되어 배는 움직이지만 점점 가라앉는다. 깁슨은 영국군에 묻어 덩케르크를 탈출하려고 죽은 영국군 병사의 인식표를 훔친 프랑스 병사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알렉스와 토미는 가라앉는 어선에 꽁꽁 묶인 가엾은 프랑스 병사 깁슨을 남겨 둔 채 배를 버리고 탈출한다. 특전훈련을 받은 최강의 특전사 병사가 아님이 분명한 깁슨이 그 배에서 살아나왔으리라고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 퍽이나 기묘한 장면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분명 독일에 대항하는 동맹국이며 연합군이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졌던 피비린내 나는 역사적 사실들을 생각하면 아무 일 없었던 듯 시치미 떼고 살아가는 그들이 의아하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다. 나폴레옹이 묻힌 앵발리드(Invalide)에 영국인들이 불지르러 가지도 않고, 넬슨 제독의 동상이 하늘 높이 내걸린 트라팔가 광장에서 프랑스 관광객들이 치욕스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전쟁’이라는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모든 인위적인 ‘봉인’이 해제되는 순간 역사 속에 쌓인 오물들이 쏟아진다. 영국병사들은 동맹국 프랑스 병사를 마치 적군처럼 묶어 침몰하는 배 속에 남겨둔 채 떠나듯이 말이다. 
▲ 감성이 아닌 이성으로 대화해야 앙금이 남지 않는다.[사진=뉴시스]
영국의 역사철학자 E. H. 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한다. 어려운 말이다. ‘대화(Dialogue)’라는 말이 어렵다. Diallogue는 ‘Dia-(~을 통하여)’와 ‘logos(이성)’라는 그리스어의 합성어다. 결국 ‘대화’란 ‘이성’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역사란 과거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현재’가 ‘과거’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곧 과거사 정리일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성을 통해 서로의 과거를 이해하고 정리했다면 영국군 병사들에게 사지死地에 버려지는 동맹국 프랑스 병사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정권이 바뀌고 어김없이 ‘과거정권’ 논란이 불거진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봉인 해제된 온갖 남루한 것들이 쏟아진다. ‘적폐청산’의 공격논리와 ‘정치보복’이라는 방어논리가 거칠게 부딪친다. 판단은 결국 국민들의 몫이겠으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E. H Carr의 말과 그중에서도 ‘대화(Dialogue)’라는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오늘이다. 혹시 우리는 지금 ‘과거’와의 대화를 이성적으로 하지 않고 감성적으로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것은 대화가 아니다. 과거를 감정적으로 다루면 역사의 앙금은 계속 쌓일 뿐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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