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C의 두 얼굴

불공정무역행위의 피해를 막기 위한 무역구제기관이자 대통령 산하 행정기관.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그리스 신화의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갖고 있다. 당연히 집권자의 입김이 ITC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ITC가 통상압박을 위한 무기로 악용되고 있다는 우려가 쏟아지는 이유다. 한국경제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더스쿠프(The SCOOP)가 ITC의 ‘야누스 리스크’를 분석했다.

▲ ITC가 세탁기와 태양광에 이어 한국산 반도체의 불공정무역행위 조사에 착수했다.[사진=뉴시스]

#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미국에 수출하는 세탁기에 50%의 관세를 부과해달라.” 지난 10월 18일 미국의 가전제품 제조회사 월풀(Whirlpool)이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전달한 의견서의 내용이다.

10월 5일 ITC가 월풀의 “한국산 세탁기로 인해 우리(미국) 산업이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는 청원에 “산업피해를 받고 있는 게 맞다”고 판정을 내리자, 이번엔 구체적인 구제조치안을 전달한 것이다. ITC가 월풀의 제안이 합당하다고 인정하면 2018년 2월부터 한국산 세탁기에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가 취해질 공산이 크다.

# 10월 31일 ITC는 태양광 산업에 세이프가드를 적용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4월 26일 미국 태양광 전지제조회사 수니바(Suni va)가 제기한 청원을 수용한 결과였다. ITC는 한국에서 수입하는 태양광 모듈ㆍ셀에 35%의 관세를 부과하는 권고안을 제시했다. 이 구제조치안은 미국 행정부의 승인만 받으면 2018년 1월에 바로 적용된다.

미국 세탁기ㆍ태양광 산업에 세이프가드가 발동되면 우리나라의 관련 업체들은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이 세계 최대 가전ㆍ태양광 시장 중 한곳이기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세탁기와 태양광 모듈ㆍ셀 제품의 대미對美 수출액은 각각 10억 달러(약 1조1156억원), 13억 달러에 달했다. 두 제품의 마진율이 낮은 편에 속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추가 관세부과는 상당한 악재로 작용할 게 분명하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다. ITC가 이번엔 국내 최대 수출 산업인 반도체에 손을 뻗쳤다. 지난 9월 28일 미국 반도체 패키징시스템 전문회사 테세라(Tessera)가 삼성전자의 지적재산권 침해 문제로 구제조치를 요청한 게 발단이 됐다.

업계에 따르면 테세라는 자신들의 웨이퍼레벨패키징(WLP) 기술을 침해한 삼성전자의 반도체 제품과 해당 반도체가 탑재된 제품들에 수입금지조치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지난 10월 31일 ITC는 이를 받아 들여 자국 산업에 피해가 있는지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한마디로 ITC의 결정이 한국경제를 쥐락펴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ITC는 어떤 곳일까.

ITC는 미국 산업을 불공정무역행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무역구제기관이다. 이 기관이 행하는 무역구제조치는 크게 네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덤핑행위에 대한 반덤핑조치, 둘째는 정부보조금을 받는 수입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상계관세조치, 셋째는 자국 산업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수입품을 제한하는 세이프가드, 마지막은 자국 기업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한 제품을 수입ㆍ판매 금지하는 조치다.

한국산 세탁기와 태양광은 세번째 기능인 세이프가드, 반도체는 마지막 지적재산권 보호조치에 해당한다. 물론 무역국제기관이 미국에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다수 자유무역국가는 무역구제기관을 두고 있다. 다만, 우리나라의 무역위원회가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에 있는 것과 달리 ITC는 미국 대통령 산하의 독립기관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준사법기관이자 행정기관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대통령 산하의 행정기관인 미 ITC는 정치적 입김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실제로 ITC가 행사한 무역구제조치의 최종 결정권자는 미 대통령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2000년대 초반 이후로 뜸했던 세이프가드가 최근 자주 등장하는 이유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정책적 행보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원목 이화여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ITC의 구제조치는 사법절차처럼 두 기업을 공정하고 대등한 위치에서 누가 잘했느냐를 따지는 게 아니다”면서 “자국 산업을 보호하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자국의 입김이 작용하게 마련이고, 당연히 문제를 청원한 기업이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해서 펼친 정책 중 하나가 무역구제를 공격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라면서 “ITC가 그런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여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ITC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ITC의 구제조치가 부당하다고 여겨지면 세계무역기구(WTO)에 불공정무역행위로 제소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WTO가 우리나라 손을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미국이 이를 따르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럴 경우 WTO는 우리나라에도 무역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데 ‘힘’에서 밀리는 우리나라가 이를 감행하기는 쉽지 않다. 최 교수는 “과거 미국이 버드수정법으로 논란을 일으켰을 당시에도 우리나라는 WTO에 제소해서 이겼지만 양국의 이해관계로 인해 보복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고 꼬집었다.

세이프가드 발동 막기 어려워

더구나 ITC의 이번 구제조치가 세이프가드라는 점도 우리나라엔 불리하게 작용할 공산이 크다. 세이프가드는 덤핑행위나 보조금이 없더라도 단순히 자국 산업을 위협할 만큼 ‘잘 팔린다’는 이유로 취할 수 있는 조치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산 세탁기의 수출량이 증가한 건 사실이어서 세이프가드를 무마할 순 없을 것”이라면서 “다만 35%나 50%의 관세가 과도하다고 인정되면 이를 낮추는 정도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무역구제조치, 특히 세이프가드는 좀처럼 발동되지 않는다. 자유무역경쟁체제에서 비난받기 딱 좋은 행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ITC는 최근 들어 스스럼없이 세이프가드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가 담겨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무역구제의 탈을 쓴 ITC의 통상압박이 국내 산업을 위협하고 있다는 점이다. 위기는 생각보다 심각하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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