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박스 꼼수 천태만상

“무엇이 들어있을까?” 박스를 뜯어볼 때까지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랜덤박스가 인기를 끈 이유는 ‘기대감’과 ‘호기심’이었다. 소비자와 마찬가지로 판매자도 박스 안 제품을 모른다는 점은 또다른 인기 요소였다. 그런데 판매자가 랜덤박스 안 제품을 만지작거렸다면 어찌해야 할까. 운을 기대하는 소비자들의 심리를 이용해 꼼수를 부리는 랜덤박스 업체들의 천태만상을 살펴봤다.

▲ 운을 기대하는 소비자의 심리를 이용한 랜덤박스 업체들의 꼼수가 판을 치고 있다.[사진=아이클릭아트]

쓰던 향수가 얼마 남지 않아 새로운 걸 구입해볼 생각으로 웹서핑을 하던 김가영(가명ㆍ29)씨. 스마트폰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던 그의 눈에 ‘명품랜덤’이란 문구가 들어왔다. 5000원이 채 안 되는 가격. ‘선착순 한정수량’이라는 말에 괜스레 마음이 급해진 김씨는 해당 딜을 클릭, 구매페이지로 들어갔다.

눈을 사로잡는 명품향수 이미지에 ‘대박’ ‘만족’ ‘샤넬이 왔어요’ 등 후기가 빼곡했다. 김씨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구매 버튼을 클릭한 후 옵션 선택. 1차 ‘여성용’, 2차 ‘일반형’을 체크해 구매 완료. 내친 김에 같은 가격의 뷰티 랜덤박스(일반형)까지 결제했다. 이날 김씨가 배송비 3000원을 포함해 ‘랜덤으로 명품을 받을지도 모를 기회’에 지불한 값은 1만2850원.

배송도 빨랐다. 다음날 온라인몰 이름이 크게 박힌 택배박스가 도착했다. 어떤 명품향수와 화장품이 왔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포장을 뜯기 시작한 김씨. 먼저 모습을 드러낸 향수에 김씨는 잠시 갸웃했다. ‘럭스트리(50mL)’라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브랜드가 떡하니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검색을 해보니 수입향수 유통업체가 국내에서 만든 자사 브랜드였다. “5000원이면 그럴 수도 있지.”

김씨는 기대감이 남아 있는 상태로 남은 뷰티 랜덤박스를 열었다. ‘악녀파티’ 립라커? 이번에도 역시나 생소한 브랜드였다. “후기를 보면 다들 명품 브랜드를 받았다고 난리던데, 나는 지지리도 운이 없나보다.” 김씨의 설레는 쇼핑은 그렇게 실망과 자괴감으로 끝났다.

 

브랜드와 가격이 제각각인 상품을 박스에 담아 주문과 동시에 임의로 송장을 붙여 무작위로 발송하는 확률형 상품 서비스 ‘랜덤박스’가 인기다. 소비자는 물론 판매자도 박스를 열 때까지 상품을 알 수 없다는 점이 소비자들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한 결과다. 온라인 쇼핑업체들이 이벤트성으로 팔다가 인기를 끌자 하나의 상품 형태로 굳어졌다.

문제는 소비자를 기만하는 변질된 랜덤박스가 판을 치는 탓에 관련 민원이 해마다 늘고 있다는 점이다. 랜덤박스의 본래 취지인 ‘임의’와 ‘무작위’는 온데간데없고 판매자의 선택에 따라 소비자가 지불한 가격 이하의 상품을 받게 되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1372 소비자상담센터에 접수된 랜덤박스 관련 상담사례만 봐도 그렇다. 2015년 89건이던 랜덤박스 상담 건수는 2016년 148건으로 66% 증가했고, 올해엔 6월까지의 누적 상담 건수만 100건에 이른다.

내용도 다양하다. 소비자 한동진(가명)씨는 상품을 받고 나서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미리 상품을 포장해 놓은 게 맞을까.” 동봉된 품질보증서에 적힌 날짜가 한씨가 해당 박스를 구매한 날짜와 동일했기 때문이다.

판치는 꼼수에 늘어나는 민원

랜덤박스의 핵심은 ‘호기심’이다. 언급했듯 소비자든 판매자든 박스 안의 내용물을 몰라야 한다. 그래야 소비자는 ‘지불한 값보다 더 비싼 제품이 들어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만끽할 수 있다. 한씨는 불쾌함을 토로했다. “업체 쇼핑몰 공지에는 ‘옵션별로 미리 포장을 해놓은 상태에서 무작위로 발송되는 상품’이라고 돼 있다. 그런데 아무래도 판매자가 개봉 후에 상품을 확인하고 골라서 발송한 거 같다.” 한씨는 반품을 신청했지만 “상품 포장이 벗겨져 있다”는 이유로 업체 측으로부터 반품 불가 통보를 받았다.

또다른 소비자 정지연(가명)씨는 랜덤박스 상품이 기대 이하였다는 후기를 남겼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홈페이지 게시판에선 그 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개인블로그에 작성한 후기는 해당업체의 요청에 의해 명예훼손으로 ‘게시중단’ 처리됐다.

다시 글을 올려도 똑같았다. 왜일까. 업체가 소비자의 불만족 이용후기를 의도적으로 게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온라인몰에 ‘대박이다’ ‘만족한다’는 긍정적인 후기만 가득했던 이유다. “온라인 쇼핑을 하다보면 상품이 맘에 들 수도 있고 안들 수도 있다. 하지만 좋지 않은 후기를 썼다고 노골적으로 삭제하는 건 아닌 것 같다.”

▲ 랜덤박스는 상품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사진=아이클릭아트]

지난 8월 공정위는 전자상거래법 위반 행위를 적발하고 시정조치를 내렸다. 그 명단엔 소비자가 작성한 불만족 이용후기를 고의적으로 게시하지 않아 소비자들이 구매 과정에서 ‘만족’ 후기만 볼 수 있도록 한 우주그룹(우주마켓)도 있었다.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보호에 관한 법률(전상법)’ 제21조 1항에는 거짓 또는 과장된 사실을 알리거나 기만적 방법을 사용해 소비자를 유인 또는 소비자와 거래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소비자 권익’ 위해 영업정지 철퇴 

우주그룹의 꼼수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상품 정보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거나 판매하지 않는 상품 이미지를 표시하고, 자체 제작한 상품의 소비자 가격을 높게 책정에 마치 낮은 가격으로 할인하는 것처럼 소비자를 속였다. 공정위는 해당업체에 시정명령 공표(7일), 과태료 800만원, 해당상품에 대한 영업정지 90일 제재를 내렸다.

시계 랜덤박스를 판매한 더블유비(워치보이), 트랜드매카(타임메카)도 광고와 달리 판매자가 자의적으로 상품을 선택해 발송하거나 거짓 구매후기를 작성한 것이 적발돼됐다. 이들 업체는 공정위가 조사를 착수하자 랜덤박스 판매를 중지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현재 온라인에서 랜덤박스가 성행하고 있는 만큼 이번 조치로 전상법 위반 행위에 대해 행정 처분의 실효성을 확보했다”며 “앞으로도 소비자의 권익을 위해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시정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여성소비자연합 관계자는 “랜덤 상품은 소비자의 ‘운’으로 상품이 결정되는 특성상 구매 이후 책임이 소비자에게 전가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판매자가 상품의 종류와 가격대, 확률을 판매 페이지에 공개해 소비자의 알권리를 확보할 수 있는 규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본보기’도 중요하지만 유사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더 강력한 조치가 마련돼야 한다는 얘기다.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lamer@thescoop.co.kr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