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사일런스 ❷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사일런스’는 17세기 포르투갈 가톨릭 ‘제수이트(Jesuit)’교단의 선교사 크리스토바오 페레이라 신부(리암 니슨 역)의 실화를 다룬다. 일본으로 건너가 선교宣敎에 나섰던 그는 에도 시대 도쿠가와 막부 통치 하에 벌어졌던 천주교 박해의 공포와 참상을 온몸으로 겪는다. 
 
페레이라 신부는 기독교의 역사에 ‘배교背敎’의 상징처럼 기록된 인물이다. 일본으로 간 페레이라 신부는 도쿠가와 막부의 혹독한 탄압에 직면한다. 5시간에 걸친 악형을 당한 끝에 자신의 종교를 버리고 일본 선禪불교로 개종한 후 ‘선교사’에서 ‘스님’으로 극적인 변신을 한다. 이름도 사와노 추안沢野忠庵으로 개명한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도쿠가와 막부가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기술했듯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페레이라의 변명’을 기록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페레이라 신부의 고통스러운 회고로 시작한다. 페레이라는 자신이 기독교로 개종시킨 수많은 일본인들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끔찍한 고문과 형벌을 받고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배교를 거부하는 일본 신자들에게는 가혹한 고문이 가해지고 결국은 처형된다.
 
▲ 도쿠가와 막부는 배교를 거부하던 신자들에게 가혹한 고문과 처형을 가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시마바라의 난(1637~1638년)’을 진압할 때 대부분의 반란군들은 일본식으로 목을 잘라 처형했지만 기독교라는 서양 바이러스에 오염된 일본인들에게는 ‘단두斷頭’도 성에 차지 않거나 안심이 안 됐던 모양이다. 기독교 신자들을 해안가 나무 기둥에 묶어 만조 때 자연스럽게 익사시키고, 그 사체는 태워 없애버린 것이다. 15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마녀사냥(Witchcraft)’은 ‘마녀’들을 우물에 익사시키거나 화형에 처했다는데, 영화 속 기독교 신자 처형 방식은 바닷물에 빠트려 죽이고 다시 태워버리는 방식이다. 
 
도쿠가와 막부에게 기독교는 ‘악령’ 그 이상이었던 듯하다. ‘악령’을 물과 불의 이중 잠금 장치로 완벽하게 봉인한다.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을 흔히 홀로코스트(Holocaust)라고 칭한다. 홀로코스트는 ‘완전히 태워 제물로 바친다’는 그리스어에서 기원한다. 전염병으로 죽은 사체는 태워 없애야 추가적인 역병의 확산을 방지할 수 있다.

13세기 유럽을 초토화시켰던 페스트 사망자 시체는 모두 소각이 원칙이었다. 페스트균처럼 ‘서양귀신’에 감염된 인간은 태워 없애야 안심이 됐던 것이다. 히틀러에게도 ‘유대인 병원균’은 페스트만큼이나 끔찍하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기록에 의하면 배교를 거부하는 일본의 신자들을 나가사키 지방의 활화산으로 유명한 운젠산雲仙岳에 끌고가 펄펄 끓는 온천물에 집어넣어 삶아 죽이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서양귀신’ 바이러스는 젖병처럼 끓는 물에 삶아 멸균해야 안심이 되었던 듯하다. 가히 엽기적이다.
 
사람을 태워 죽이고 삶아 죽이는 지옥문이 열려버린 17세기 일본 나가사키에서 페레이라 신부가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가 믿는 ‘하나님’은 ‘침묵’할 뿐이다. 아마도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계속되는 ‘임의 침묵’이 페레이라 신부가 ‘임’을 버리고 생뚱맞게 일본 ‘스님’으로 변신하도록 했던 모양이다. 수없이 올리는 간절한 기도에도 신은 응답하지 않았다. 페레이라가 ‘임의 침묵’에 절망했는지 아니면 분노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복합적이었을 것 같다.
 
▲ 우리 사회의 젊은이들은 간절한 노력에도 응답 없는 사회에 좌절하고 분노한다.[사진=뉴시스]
17세기 일본 나가사키에 ‘종교탄압’이라는 지옥문이 열렸다면 21세기 대한민국에는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이라는 지옥문이 열렸다. 모두가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위해 페레이라 신부처럼 간절히 기도한다. 모두 치열하게 공부하고 스펙을 쌓고 ‘기도문’을 회사에 넣지만 회사는 침묵한다. 모두 알뜰히 저축도 해보지만 ‘아파트’도 침묵한다. 당연히 사랑도 침묵한다.
 
그러하니 모두들 페레이라 신부처럼 좌절하거나 분노한다. ‘비트코인 투자자’들의 분노에서 페레이라 신부의 분노를 읽는다. 간절한 노력에도 응답 없는 사회에 좌절하고 분노한 많은 젊은이들이 ‘회사’와 ‘은행’이라는 신을 버리고 마치 이교도의 우상에 열광하듯 ‘비트코인’에 열광한다. 페레이라 신부의 ‘배교’가 무죄라면 이들도 무죄인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광풍 속에서 유대인 수용소 벽에 어느 유대인이 남겼다는 시 한구절이 가슴 아프다. “I believe in the Sun, when it does not shine. I believe in God, when he is silent.(태양이 빛나지 않아도 태양이 있다는 것을 믿듯이, 신이 침묵하여도 신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 사회가 아우슈비츠 같은 유태인 수용소가 아니라면 우리 모두에게 이런 처절한 믿음까지 요구할 수는 없지 않은가.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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