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과 생존의 무서운 간극

대출을 많이 받는 소득계층은 어디일까. 통상 생활 형편이 여의치 않은 서민층이 대출을 많이 받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자산이 많은 부자들도 대출을 많이 받는다. 문제는 대출의 ‘질質’이 다르다는 점이다. 서민은 생계를 위해, 부자는 투자를 위해 대출을 활용한다. 부자는 갈수록 돈을 더 벌고, 서민은 궁핍해지는 이유다. 더스쿠프(The SCOOP)가 부자 빚과 서민 빚의 질을 분석했다.

▲ 자산이 많은 부자일수록 대출 규모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대부분은 부동산 투자에 쓰였다.[일러스트=아이클릭아트]

우리나라의 가계부채가 지난해 3분기 기준 1400조원을 훌쩍 넘었다. 금융위기 정도를 가늠할 수 있는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대출도 같은 시기 94.1%를 찍었다. 전년 동기 대비 3.2%포인트 오른 수치다. 소득보다 대출이 불어나는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는 건데, ‘살림살이가 점점 팍팍해진다’는 서민들의 곡소리가 부쩍 늘어난 까닭이다.

지난 2일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발표한 ‘2017 부자보고서(Korea Wealth Report)’의 내용이 흥미로운 것도 비슷한 이유다. 지난해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을 보유한 부자’들의 자산 포트폴리오를 분석한 이 보고서는 “부자들도 빚을 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10억원 이상 자산가들의 46%는 대출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 대출액 3억원 미만은 18%, 3억원 이상 5억원 미만 14%, 5억원 이상 7억원 미만 23%, 7억원 이상 10억원 미만은 7%를 차지했다. 10억원 이상을 대출한 부자들의 비중은 38%로 가장 많았다. 평균적으로 5억원의 대출을 끼고 있는 셈이었다.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국내 경기 탓에 부자들의 주머니마저 얇아진 걸까. 당연히 그럴리 없다. 부자들의 부채는 서민들의 부채와는 성격이 달랐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에 따르면 부자들이 대출을 받은 이유는 ‘거주목적 외 부동산 마련’이 32.6%로 가장 많았다. ‘절세목적(23.9%)’ ‘사업자금(17.4%)’ 등도 비중이 컸고, ‘거주주택 마련’을 위한 대출은 13.1%에 그쳤다.

‘주택구입(49.3%)’ ‘생계자금(27.1%)’ ‘주택임대차(12.6%)’ ‘대출금상환(10.2%)’ 등 일반 가계의 대출목적(한국은행ㆍ2016년 기준)과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반 가계의 대출 목적이 ‘생계’였다면 부자들의 대출 목적은 ‘투자’였다는 얘기다. 수십억원대의 자산가들이 각종 투자이득을 취하기 위해 대출을 받는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이유다.

실제로 부자들이 보유한 부동산 자산은 대부분 투자용이었다. 상업용 부동산은 43%, 투자목적 주택은 12%에 달했지만 거주용 부동산 비중은 30%에 불과했다. 자산 규모가 클수록 투자 부동산 비중도 높았다. 보유자산이 10억~30억원인 부자들은 거주용 부동산과 투자용 부동산의 비중이 각각 58%, 35%이었지만 100억원 이상의 자산가들은 두 부동산 비중의 차이가 21%, 60%로 벌어졌다.

2017 부자보고서의 대출 부분을 기술한 이정진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원은 “부자들은 자금이 부족해서 대출을 받는다기보다 다른 효과를 기대하는 경우가 많다”면서 “대표적인 효과는 대출을 끼고 사업을 하면 세금 부담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고 꼬집었다.

부자들이 대출을 받는 이유는 또 있다. 자금 출처를 명확히 밝히기 어려운 돈을 대체하기 위해서다. 강형구 금융소비자연맹 국장은 “자신의 자금을 들여 투자하려면 자금 출처를 밝혀야 하는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돈이라면 그러기가 쉽지 않다”면서 “이때 부자들이 주로 쓰는 방법이 대출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투자 부동산의 가치 하락에 따른 리스크를 피할 수 있다는 점도 부자들이 대출을 받는 이유 중 하나다. 대출이 포함된 부동산을 매각할 때 채무를 인수자에게 넘기는 채무인수조건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강 국장은 “목돈을 들이지 않고도 충분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데다 이후 부동산을 재매각할 시 채무를 100% 이행할 필요가 없어 많은 부자들이 대출을 끼고 투자를 한다”고 꼬집었다.

가계부채 1400조원 시대, 서민도 부자도 대출이 늘고 있다. 하지만 한쪽은 갈수록 형편이 어려워지고, 다른 한쪽은 갈수록 돈이 쌓인다. 서민은 돈을 빌려 세를 들고, 부자는 돈을 빌려 세를 놓기 때문일까. 이젠 대출도 양극화다.
고준영 더스쿠프 기자 shamandn2@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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