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걸의 有口有言] 딸이 있다는 건
[윤영걸의 有口有言] 딸이 있다는 건
  •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 호수 277
  • 승인 2018.02.27 06: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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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둔 아버지 마음으로
▲ 지금의 미투 운동은 여성차별과 갑질문화를 깨기 위한 국민적 저항으로 봐야 한다.[사진=뉴시스]

“딸이 있다는 건, 두려움에 떨며 한 사기꾼을 위해 화장을 하는 그녀를 보는 것. 딸이 있다는 건, 예전 모습 그대로 여인들을 대하지 않는 것. 딸이 있다는 건, 계속해서 갈망하는 것, 그리고 믿는 것. 딸이 있다는 건, 범죄를 저지르는 것, 죄인이 곧 피해자인 범죄, 딸이 있다는 건.”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셰익스피어 원작)’에서 아버지가 부르는 ‘딸이 있다는 건’이란 노래다. 곱게 키운 딸이 어느날 정해진 혼처를 마다하고 무단가출해 변사체로 발견됐으니 아버지 심사가 오죽하겠는가. 줄리엣의 아버지는 딸에 대한 애틋하고 서운한 마음을 맛깔스러운 노래로 풀어낸다.

딸이 태어나면 아버지는 펄쩍 뛸 정도로 좋아한다. 그러나 문득 딸이 곁에서 멀어졌다는 느낌이 들면 아버지는 메아리 없는 짝사랑을 하는 것처럼 상심의 늪에 빠져든다. 자칫하면 아버지와 딸은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이로 바뀔 수 있다. 딸은 세월과 함께 변해 가는데, 아버지는 어릴 때 품안의 딸로만 생각한다.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식에 참석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딸인 이방카 백악관 선임 고문의 우아하면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며 이 땅의 딸들이 떠올랐다. 왜 한국의 딸들은 세계적으로 우수한데 그에 걸맞은 역할을 맡지 못하느냐 하는 안타까움이다.

이번 동계올림픽에서 쇼트트랙 대표와 경북 의성 출신 컬링팀의 눈부신 활약을 보면 한국여성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기량과 자질을 뽐낸다. 비록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남북단일 여자 아이스하키팀과 한복을 입고 홀로 아리랑 선율에 맞춰 빙판을 누볐던 민유라-겜린의 피겨스케이팅은 눈물겹도록 환상적이었다. 스포츠에 그치지 않고, 사회 각 분야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그녀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에서 밝은 미래가 기대된다.

그러나 한국처럼 딸이 차별받는 나라도 드물다. 딸이 태어나면 펄쩍 뛸 정도로 좋아하지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을 보면 딸을 철저히 외면한다. 재벌가에서도 며느리에게는 가업을 물려줘도 딸에게는 냉정하기 짝이 없다. 딸에게 주는 것은 곧 사위에게 가는 것이고 사위는 성姓이 다른 남이라는 인식 때문일 게다. 고려시대에서부터 조선 중기까지는 아들과 딸이 부모로부터 똑같이 재산을 물려받았으나 17세기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남녀균분의 원칙이 무너졌다. 역사가 오히려 퇴보한 셈이다.

이건 생물학적으로도 맞지 않는 거다. 호주제 폐지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던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는 핵 DNA는 부계와 모계가 똑같은 비율로 제공하지만, 생명체 초기 단계에서는 모계의 기여도가 훨씬 높다고 말한다. 세포 속의 에너지발전소인 미토콘드리아는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만 유전되기 때문에 인류 최초의 조상인 ‘루시’도 찾아낼 수 있다며 남녀차별은 비과학적인 편견의 잔재라고 강조한다.

가까스로 사회로 진출해도 여성의 머리 위를 짓누르는 유리천장은 높기만 하다. 미투(Me Too) 운동은 단순한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고발하는 차원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 고질처럼 퍼진 여성 차별과 갑질문화에 대한 국민적인 저항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의 경우 조직적 차원에서 범죄를 은닉하고, 피해자들을 핍박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범죄자보다 범죄를 두둔하는 침묵의 카르텔이 더 두렵다.

아버지의 행동을 바꾸는 데 딸만 한 존재가 없다고 한다. 미국 에보니아 워싱턴 교수(예일대)는 국회의원의 의정활동을 바탕으로 이른바 ‘딸 효과(daughter effect)’를 분석했다. 아들 둘인 의원은 친여성 지수가 44점인 반면, 1남1녀를 둔 의원은 51점, 딸만 둘인 의원은 67점이었다. 사법부에서도 딸을 둔 아버지들의 친여성적 경향이 했다. 기업에서도 딸을 둔 CEO가 여성채용에 더 관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제 한국은 기로에 섰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을 지금처럼 차별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둘 것인가, 아니면 그녀들을 새장 밖으로 훨훨 날아가게 해줄 것인가. 딸이 있다는 건 자신의 가정에서부터 여성이 차별받지 않게 대접해주는 거다. 한걸음 나아가 남의 집 딸에게도 자신의 딸만큼 관심을 가져주는 거다. 저출산대책을 아무리 내놓아도 여성들이 차별받는 사회에서는 백약이 무효다. 아이 낳는 것을 기피하는 것은 남녀차별에 대한 그녀들의 말없는 파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구조 개혁차원에서 이 땅의 아버지들이 “나도 같은 생각(미투)”이라고 합창해야 답이 나온다. 모두가 딸을 둔 아버지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딸은 죄가 없다.
윤영걸 더스쿠프 편집인 yunyeong0909@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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