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하 의사 의거 90주년에 즈음하여…

항일투쟁은 의로움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고 광명으로 어둠을 압도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수많은 의인은 고귀한 생명을 바쳐가며 항일투쟁에 헌신했다.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목숨을 잃고 순국한 의인도 많았다. 조명하(1905~1928년) 의사도 투쟁 끝에 세상과 등졌다. 하지만 조명하 의사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는 걸까.

▲ 조명하 의사 의거 현장에 모인 푸른세상 ‘아세아문예’ 시인들.[사진=더스쿠프 포토]

2018년은 조명하 의사의 ‘타이중臺中 의거(대만)’가 발생한 지 90주년이 되는 해다. ‘조명하 의사 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뜻깊은 해를 준비하고 있지만 인지도 면에서 볼 때 한국과 대만의 전국화는 갈 길이 멀어 보인다. 1928년 5월 14일 오전 9시50분 24살의 조명하는 합작금고은행(현재 명칭) 앞 곡선길에서 타이중 기차역으로 향하던 일본의 왕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자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王(1873~1929년)를 기다리다가 척살하고 같은해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한 민족영웅이다.

조명하가 던진 독검을 맞은 구니노미야는 거사 8개월 만인 1929년 1월 사망했다. 그럼 구니노미야는 누구인가.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황족으로선 처음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황족인 그는 메이지明治 천황과 다이쇼大正 천황 시기에 일본군 육군대장을 지냈다. 그는 쇼와昭和 천황의 부인인 고준香淳 황후의 부친이다. 아키히토明仁 천황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당시 구니노미아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1918년 자신의 친딸인 구니노미야 나가코久邇宮良子가 히로히토裕仁 황태자와 혼약한 정실로 간택됐다.

하지만 순수한 혈통을 내세웠던 당시 황실은 1920년초 우연히 구니노미야 나가코의 남동생인 구니노미야 구니히데久邇宮邦英王가 색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파혼을 요청했다. 그러자 구니노미야는 불같이 화를 내며 “만약 황실에서 파혼을 요구해 온다면 내 딸을 죽이고 온가족이 자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내 신체를 검사하라”며 매스컴과 정계의 인물들에게 압력을 강하게 넣었다.

▲ ❶ 조명하 의사는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더불어 조선의 4대 의사로 불린다. ❷ 타이중 의거 직후 체포돼 고문과 구타를 당한 조명하 의사의 모습.[사진=더스쿠프 포토]

여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황실은 1921년 2월 혼약은 변한 게 없다고 선포하기에 이르렀고, 그 일에 관여했던 궁중의 신하들은 면직되거나 보직이동 됐다. 신적인 존재인 일본 천황의 결정을 구니노미야가 돌려놓은 셈이다. 어쨌거나 구니노미야는 목적을 달성했다. 그의 딸은 1924년 히로히토와 결혼해 고준香淳 황후가 됐다. 이처럼 기세가 천황을 능가했던 구니노미야를 척살한 조명하 의사의 ‘타이중 의거’는 왜 90년이 다되도록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중국이나 일본이 아닌 대만에서 거사가 일어났기 때문일까.

국민에게 잊힌 ‘타이중 의거’

김구 선생이나 독립단체의 도움을 받지 않고 단독으로 치른 거사이기 때문일까. “20대 초반 그 어린 나이에 나라를 위한 일념만으로 갓 낳은 아들까지 외면한 채 홀로 먼 길을 떠나기까지 얼마나 큰 번민과 결심이 필요했을지 저는 상상조차 가지 않습니다. 조국의 독립이란 대체 그 분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조명하 의사 장손 조경환).” 이제 우리는 잊힌 영웅 ‘조명하’의 존재를 찾아야 할 때다. 실제로 그래야만 하는 의무도 있다.

필자는 2006년 다른 논문을 쓰려고 ‘대만역사사전’을 들춰보던 중 ‘조명하 사건’을 설명한 부분을 우연히 발견하고 머리끝이 쭈뼛 설 만큼 아픈 감정을 느낀 적이 있다. 그를 사실과 완전히 다르게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27년 1월 타이중시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차포茶鋪에 취직했지만 대우가 안 좋고 앞날에 대해서도 비관적인 생각이 들어 1928년 5월 14일 자살하기로 결심했다.” 조명하 의사의 정보가 왜곡된 건 휘진파許進發라는 대만 학자가 고증도 없이 일본 자료 ‘와시노스 아츠야鷲巢敦哉 대만경찰40년 史話(1938년)’를 그대로 번역했기 때문이었다.

▲ ❸ 조명하 의사가 죽인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❹ 막강한 권력을 뽐냈던 구니노미야 일가.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사진=더스쿠프 포토]

필자가 대만에서 조명하 의사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중국어 논문 발표’ ‘의거지와 순국지에 표지석 설치’ 등을 추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많은 관심을 받진 못했지만 지난해 5월 국립 대만대학에서 조명하 의사 연구 좌담회를 개최하는 성과를 올렸다. 올해 5월과 7월에는 타이베이와 서울에서 각각 한차례씩 심도있는 학술회의를 개최할 계획이다.

조명하 의사의 유일한 아들인 조혁래옹은 지난해 10월 15일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조혁래옹은 갓 태어난 자식을 한번 안아보지도 않고 집을 떠난 아버지 조명하 의사의 현창사업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아쉽게도 조혁래옹은 평생을 을乙로 살았다. 현창사업을 도와주겠다고 접근한 사람들은 이런저런 명목으로 금품을 요구하기 바빴다. 그중엔 종교인도 있었다니,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조혁래옹의 명복을 빌며, 그분이 생전 못 다한 현창사업, 특히 의거지 대만에서의 현창사업에는 많은 관심이 모아지길 바란다.

의사 영혼 녹아든 사업 진행해야

대만 교민과 주타이베이 한국대표부 역시 조명하 의거를 대만과 한국에 알려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국가보훈처 등 관련 정부부처는 보여주기식 혹은 때우기식 현창사업만 할 게 아니라 의사의 영혼이 녹아들어간 사업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공식적으로 조명하 의사의 의거지를 방문한 건 2015년 대학생 탐방단, 지난해 11월 아시아문예 동인 22명뿐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엔 아무런 표지석도 없었다고 하니, 얼마나 어색하고 멋쩍은 탐방이었을까. 조명하 의사를 기억해야 할 때다. 정부, 사회, 국민의 의무다.
김상호 대만 슈핑과기대 교양학부 중문영역 교수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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