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사일런스 ❹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은 ‘사일런스(Silence)’에서 기독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서 중요 덕목으로 여겨지는 ‘용서’와 ‘회개’의 문제를 응시한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크리스천(기리시탄ㆍキリシタン)이던 키치지로라는 인물이 배교를 반복하는 모습을 통해 용서와 회개에 대한 시선과 고민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을 뉴욕의 빈민가에서 보낸 스코세이지 감독에게 동네에 자리잡은 교회의 존재 의미는 꽤나 혼란스러웠다. 지역 빈민가 대다수의 주정뱅이와 불량배들이 그 교회에 다니고 매주 그곳에서 죄를 고백하고 새로 태어나지만 주정뱅이와 불량배들은 전혀 변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죄악은 점점 커져가기만 한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을 쓴 오스카 와일드는 아마 자신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도덕적 타락에 분노했던 모양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죄는 회개하고 용서받을 일이 아니라 처벌받아야 할 일”이라고 엄중한 결론 내린다.

회개와 용서로는 세상을 구원할 수도 없고 세상을 더욱 타락시킬 뿐이라고 믿는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도 회개와 용서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었던 모양이다. 스코세이지 감독은 키치지로라는 인물을 통해 용서와 회개라는 덕목에 대해 고민한다.

키치지로는 나가사키의 평범한 어부이자 일가一家가 모두 기리시탄이다.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기리시탄’이라는 딱지는 ‘시마바라의 난亂’ 이후 갑자기 박멸의 대상이 된다. 전원 체포된 키치지로 일가는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다. 예수를 부인하고 그 예수상像에 침을 뱉으면 살려주고 그것을 거부하면 죽음이다. ‘예수지옥, 불신천국’인 셈이다. 키치지로 일가는 모두 순교하지만 키치지로는 마지못해 대단히 공손하고 소심하게 예수상에 침을 뱉고 방면된다. 침 뱉는 ‘꼴’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약속은 약속이기에 ‘쿨’하게 방면한다.

▲ 스코세이지 감독은 배교자의 모습을 통해 ‘용서’와 ‘회개’의 문제를 응시한다.[사진=더스쿠프 포토]

키치지로는 그렇게 살아남았지만 살아도 산 게 아니다. 죄책감과 수치심에 괴로워한다. 일가가 모두 처형됐으니 돌아갈 곳도 없다. 그의 사회적 울타리였던 기리시탄 사회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렇다고 비非신자 사회에서 그를 받아주지도 않는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일 뿐, 빨았다고 행주로 쓰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의 불문율不文律이다.

병원에서 전염병 완치 증명서를 발급받았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덥석 안아주지는 않는다. 사람 죽인 사람이 형기를 모두 채우고 나왔다고 해서 평범한 이웃으로 받아주지는 않는다. ‘관청’은 ‘쿨’하게 도장을 찍어주지만 사회는 그렇게 ‘쿨’하지 않다. ‘낙인’이란 그렇게 무섭다.

결국 일본에서 살 수 없게 낙인 찍힌 키치지로는 마카오까지 흘러가 술주정뱅이 폐인이 된다. 일가가 도륙당하고 ‘주님’을 배신하고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고통에 술에 빠져든다. 배교와 함께 종적을 감춘 페레이라 신부를 찾아나선 로드리게스와 가루페 신부에게 자신들에게 일본을 안내할 나가사키 출신의 일본인이 마카오에 살고 있다는 정보는 그야말로 ‘할렐루야’다. 키치지로는 로드리게스 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해하고 용서를 받는다. 그리고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고 그들을 일본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일본 관헌에 붙잡힌 키치지로는 또 다시 예수상을 발로 밟는 ‘후미에踏み絵’ 의식을 치르고 풀려나기를 반복하고 로드리게스 신부를 관헌에 팔아넘기기까지 한다. 영화 속에서 은화 50냥에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의 배신 장면이 패러디된다. 일본 관헌들이 로드리게스 신부를 끌고가며 밀고자 키치지로에게 비웃음 찬 얼굴로 개에게 먹이를 던지듯 은화를 땅바닥에 뿌린다.

로드리게스 신부를 팔아먹은 키치지로는 또 괴로워한다. 키치지로는 자신의 밀고로 감옥에 갇힌 로드리게스 신부를 찾아와 또 고해성사를 부탁한다. 신부 체면에 대놓고 욕은 못하지만 로드리게스 신부도 황당하지만 어쩔 수 없이 또 용서한다. 이쯤 되면 그의 회개는 대단히 현대적인 ‘인스턴트’성이다. 필요할 때마다 1회성으로 소비한다. 회개와 용서가 간편하니 죄 짓는 것도 그다지 꺼릴 필요없다. 필요하면 언제든 또 죄를 짓고, 회개하면 또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다.

▲ 역사 속에서 국가와 민족을 밟고 살아남은 이들을 용서하는 것만이 옳은 일일까.[사진=뉴시스]

죄와 용서를 바라보는 스코세이지 감독의 시선이 궁금해진다. 용서가 과연 미덕이기만 할까. 어지러운 역사를 헤쳐오면서 우리는 몽고족 따라 체두변발剃頭辮髮도 해보고 필요하면 일장기 흔들며 ‘텐노헤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적당히 외쳐보기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인공기와 태극기를 적당히 눈치껏 번갈아 흔들기도 하면서 살아왔다.

또한 독재자의 초상을 흔들며 살아남기도 했다. 키치지로가 예수상에 침 뱉거나 예수상을 밟고 살아남았듯, 우리네 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민족, 국민에게 침을 뱉고 밟아 뭉개며 살아남아 왔다. 키치지로를 열번이고 용서했던 로드리게스 신부처럼 그들을 열번이고 모두 용서하는 것만이 과연 옳은 일이었고 또 옳은 일일까.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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