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줬다던 우선매수청구권의 이상한 부활

우선매수청구권. 인수전에선 무서운 특권이다. 실탄만 있다면 경쟁 입찰자를 제치고 기업을 차지할 수 있어서다. 기업 경영에 실패한 경영인이 기업 정상화에 충분한 성의를 보여야만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산업은행은 이를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에 손쉽게 안겨줬다. 석연찮은 거짓말까지 동원하면서 말이다. 더스쿠프(The SCOOP)가 산업은행의 거짓말을 취재했다. 

▲ 박삼구 회장은 금호산업 인수를 신호탄으로 그룹 재건에 성공했다.[사진=뉴시스]

2015년 12월,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숙원이 풀렸다.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2009년 매각했던 금호산업을 채권단으로부터 되찾왔기 때문이다. 금호산업은 그룹의 핵심 계열사 아시아나항공의 최대주주다. 박 회장이 잃어버렸던 금호산업과 아시아나항공을 되찾을 수 있던 원동력은 ‘우선매수청구권’에 있다.

우선매수청구권의 정의는 이렇다. “기존 주주가 주식을 제3자에게 팔 때 계약체결 내용과 같은 조건으로 계약 당사자보다 먼저 지분을 인수할 수 있는 권리.” 가령 입찰 최고가격이 1조원이었다면 우선매수청구권을 행사해 같은 가격에 회사를 되살 수 있는 거다. 상당한 특권이다. 자금과 의지만 있다면 인수에 성공할 가능성이 누구보다 높다.

이 특권을 아무나 쥘 수 있는 건 아니다. ‘채권금융기관 출자전환주식 관리 및 매각준칙’에 명시된 우선매수청구권의 부여 조건은 다음과 같다. “부실책임이 있는 구舊사주는 원칙적으로 우선협상대상자에서 제외하되, 부실책임의 정도 및 사재출연 등 경영정상화를 위한 노력의 사후평가를 통해 우선매수청구권을 부여할 수 있다.”

금호그룹과 산업은행 관계자의 설명도 이와 일치한다. “박 회장은 사재출연 등 금호산업의 경영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우선매수청구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박 회장의 그룹 재건 과정을 보면 이 설명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금호그룹은 2006년과 2008년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잇달아 인수하며 단번에 재계 서열 10위권에 진입했다. 그런데 이 인수ㆍ합병(M&A)은 그룹 전체 재무구조를 흔들었다. 외부자금을 무리하게 끌어들인 탓이다. 실제로 자금난에 부닥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09년 인수기업(대우건설ㆍ대한통운)을 되팔았을 뿐만 아니라 핵심 계열사도 매물로 내놨다.

금호타이어는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갔고 아시아나항공은 채권단과 자율협약을 체결했다. 이중 가장 위태로웠던 건 대우건설을 인수한 주체인 금호산업이었다. 이 회사 역시 워크아웃의 칼날을 피할 수 없었다.


산업은행이 언급한 ‘사재출연’은 금호산업 경영정상화 과정에서 등장한다. 박 회장은 보유 중이던 금호석유화학 주식을 모두 팔아 4090억원의 현금을 확보한 뒤 자금 대부분을 금호산업(2200억원)과 금호타이어(1300억원) 유상증자에 썼다. 시기는 2012년 2월이다.
매각 준칙에 따른 우선매수청구권 부여 조건은 ‘사후 평가’다. 박 회장이 우선매수청구권을 가지려면 사재를 출연한 2012년 이후여야 한다(박삼구 회장이 진짜 희생을 했는지는 별론으로 한다).

금호산업 되찾기 ‘마침표’

그런데 산업은행이 박 회장에게 우선매수청구권을 약속한 건 이보다 앞선다. 2010년 2월 금호 지배주주와 산업은행이 작성한 합의서를 보자. “채권단은 박 회장과 박세창 부사장이 금호타이어의 경영권을 3년 동안 행사할 수 있도록 협조한다. 금호타이어와 금호산업의 경영정상화 계획이 성공적으로 달성되면, 박 회장과 박세창 부사장은 금호타이어ㆍ금호산업 주식에 대한 우선매수청구권을 갖는다.”

이런 특권을 워크아웃 초기에 약속한 건 특혜 의혹을 받기 충분하다. 이를 의식한 탓인지 박 회장뿐만 아니라 산업은행 측도 우선매수청구권의 존재를 부인했다. 2011년 11월 채권단 측이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말을 보자. “(박 회장 측에게) 우선매수청구권을 부여한 적 없다.”

하지만 산업은행의 약속대로 우선매수청구권은 박 회장의 손에 넘어왔고, 언젠가부터 “우선매수청구권은 원래 박 회장에게 있었다”는 식으로 말이 바뀌었다. 책임지는 사람도, 해명하는 사람도,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사이 우선매수청구권이라는 이 특권은 박 회장의 든든한 무기가 됐다. 애초 다른 기업은 입찰에 뛰어들기 어려웠다. 박 회장이 낼 수 없는 금액을 써내야 했던 만큼 금전적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실제로 2015년 4월 채권단은 박 회장과 단독 협상을 진행했다. 채권단은 지분가치에 경영권 프리미엄을 얹어 최대한 비싼 가격에 지분을 매각하겠다는 입장인 반면 박 회장은 낮은 가격에 지분을 매입하려했다. 금호산업 채권단은 인수가격으로 1조218억원, 박삼구 회장은 매입 희망가로 6503억원을 불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3715억원의 간극은 싱겁게 좁혀졌다. 채권단이 대폭 양보하면서다. 최종 매각가격은 7228억원. 박 회장에 우선매수청구권을 내준 시점부터 채권단에 불리한 싸움이었다는 게 재계 분석이다. 박 회장 외에 별다른 경쟁 입찰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 회장은 금호산업 인수를 신호탄으로 금호타이어를 제외한 주력 계열사를 모두 되찾았다. ‘박 회장→금호홀딩스→금호산업→아시아나항공’으로 이어지는 탄탄한 그룹 지배구조도 갖췄다.

금호산업 인수전 승리 비결

여기엔 우선매수청구권 부여를 일찍이 약속해 두고도 모르쇠로 일관한 산업은행의 거짓말도 주효했다. 그룹 재건 과정에는 수조원의 혈세가 투입됐고 그룹 계열사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지만 이 거짓말은 박 회장의 경영권만은 지켜줬다.
김다린 더스쿠프 기자 quill@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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