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시카리오❸

영화 ‘시카리오(Sicario)’는 ‘마약 조직과의 전쟁’이라는 다분히 진부한 소재를 다룬다. 제목만이라도 참신하게 붙여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생각에서였을까. ‘시카리오’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을 붙인다. 흥미로운 타이틀이다. 한국 개봉 당시에는 조금 생경한 타이틀이 마음에 걸린 듯 ‘암살자의 도시’라는 부제로 친절히 설명을 첨가한다.

 

‘시카리오’는 부제처럼 ‘암살자’다. 히브리어로 ‘단검短劍’을 뜻하는 ‘시카리(Sicarii)’에서 유래한다. 우리나라 말인 ‘식칼’과 발음도 비슷하고 의미도 유사해서 기억하기는 쉽다. 2000년 전 이스라엘 왕국이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 유대의 열혈 민족주의자들이 옷 속에 단검을 품고 다니며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로마인들에게 테러와 암살을 자행하던 자신들을 ‘시카리오(단검을 품은 자)’로 명명했다. 아마 일제에 무장 항거하던 우리나라 독립투사들의 ‘의열단’ 쯤에 해당하는 듯하다.

유대의 시카리오들은 단검을 품고 주로 번잡한 도심이나 시장통에서 로마 관리들의 행차를 습격해 단검으로 찌르고 인파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거사를 마치고 모두 비슷해 보이는 두건 달린 치렁치렁한 예수님같은 유대 전통복장이 물결치는 인파 속으로 사라지니 로마군들로서는 귀신에 홀린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군중 속으로 몸을 감춘 시카리오들을 유대 민중들이 이심전심으로 숨겨주니 검거가 거의 불가능했을 듯하다.

▲ ‘시카리오’는 히브리어로 ‘단검短劍’을 뜻하는 ‘시카리(Sicarii)’에서 유래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역사 속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암살 전문 조직은 이슬람의 ‘하사신(hashashin)’과 일본 에도시대의 ‘닌자忍者’가 대표적이다. 십자군에 맞서 공포의 대상이 됐던 하사신의 존재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통해 유럽에 널리 알려져 암살자(Assassin)의 어원으로 자리잡게 되지만 사실 유대의 ‘시카리오’가 이들보다 훨씬 앞섰던 전문 암살단의 효시쯤 되는 셈이다. 예수를 은화 30냥에 팔아넘겼다는 유다도 시카리오 출신의 열혈청년이었다고 한다. 로마에 저항하는 시카리오를 제자로 두었으니 예수님도 로마에 곱게 보일 리 없었을 듯하다.

시카리오는 ‘하사신’이나 ‘닌자’와 같은 전문 암살 조직이지만 그 성격은 다소 차이가 있다. 하사신이나 닌자는 고도의 살생 기술을 익히고 적의 진영에 은밀히 침투해 사적인 암살 임무를 수행하는 반면, 시카리오의 방식은 백주에 공개된 장소에서 상대를 급습해 처단하는 공개 처형에 가깝다.

하사신이나 닌자와 달리 민중과 공감하고 민중의 절대적 지지와 협력을 기반으로 하는 공적인 암살단인 셈이다. 시카리오라는 이름은 암살단이지만 꽤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이름이다.

억압받는 민중의 분노와 복수를 대신했던 유대의 시카리오가 난데없이 라틴아메리카의 악명 높은 마약의 중심지인 콜롬비아의 메데인과 멕시코의 후아레즈에서 마약 카르텔 행동대원의 호칭으로 부활한다. 이들의 황당한 ‘명의도용’은 짐작건대 시카리오들이 로마에 저항했던 것처럼 자신들도 부당하게 자신들을 억압하는 ‘라틴아메리카’ 정부들에 대항하는 정의의 사도로 정당화하거나 미화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 박근혜 전 대통령을 석방하라는 집회에서 태극기와 애국이 오용되는 장면을 본다.[사진=뉴시스]

이들 ‘변종’ 혹은 ‘사이비 시카리오’들은 마약 단속을 벌이는 공무원과 경찰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거나 납치하고 거액의 몸값을 받아내기도 한다. 상대 마약 조직과 시가전도 불사한다. 붕어빵이 붕어와 아무 상관없듯 이들은 ‘시카리오’라는 영예로운 이름과 아무 관련이 없는 ‘마약쟁이’ 조폭일 뿐이다. 이쯤 되면 ‘시카리오’라는 이름의 수난을 보고 지하의 시카리오들이 벌떡 일어날 일이다.

영예로운 이름이 도용당한 것이 어디 시카리오뿐일까. 한동안 주말마다 도심을 뒤덮던 수상한 태극기 물결이 지난 3ㆍ1절에도 어김없이 쓰나미처럼 몰려다녔다. 3ㆍ1절에 태극기 물결이 산하를 뒤덮는 것을 탓할 사람은 없다. 일제 강점기 일본군 총칼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손에 들고 죽어갔던 태극기다.

대한의 ‘시카리오’들이 ‘원수’들을 척살하러 길 떠날 때 수류탄을 목에 걸고 혈서를 쓴 뒤 그 앞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었던 태극기다. 하필이면 그 태극기를 들고 국정농단 사태로 탄핵당한 전 대통령을 석방하라며 ‘애국’을 외치고, 외세가 아닌 동포들에게 욕설을 퍼부어댄다. 태극기와 애국이 오용되고 어이없는 봉변을 당한다. 요즘의 ‘태극기 봉변’은 남미의 마약쟁이들에게 그 이름을 도난당한 ‘시카리오’ 꼴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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