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막사진관] 폐지 줍는 어르신과 행복한 동행
[천막사진관] 폐지 줍는 어르신과 행복한 동행
  • 이윤찬 기자
  • 호수 282
  • 승인 2018.04.05 10: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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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편 신미자 여월농업공원 원장

▲ 신미자 원장이 버섯정원을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폐지 줍는 어르신에게 새 리어카를 선물하면 행복해질까. 빈 상자를 하나라도 더 주워야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분들에게 무료건강교육은 한갓진 담론談論이지 않을까. 사회적 약자弱者를 도울 땐 신중해야 한다. 팍팍한 현실을 냉정하게 반영해야 한다. 별 도움도 안 되는 지원책을 내놓고 ‘이만하면 됐다’고 안심하는 순간, 약자는 기댈 곳을 잃는다.

여기 폐지 줍는 어르신들과 ‘행복한 동행’을 하고 있는 사회적기업 CEO가 있다. 신미자(58) 여월농업공원 원장(지엔그린 대표)이다. 그는 숱한 시행착오를 꿋꿋이 이겨낸 끝에 폐지 줍는 어르신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템은 흥미롭게도 ‘버섯’이었다. 더스쿠프(The SCOOP)와 천막사진관이 신 원장의 인생을 함께 밟아봤다. 10번째 주인공이다.

#1장. 소록도와 소박한 버섯

녹동항(전남 고흥)에서 작은 배에 올라탔다. 전날 비가 내려서인지 바람이 가벼웠다. 말로만 듣던 ‘나환자癩患者’를 처음 보는 날. 소녀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한번 가보자”는 간호사 고모의 권유를 냉큼 받아들였지만 속은 시끄러웠다. 왠지 슬펐고, 두려웠다.

배를 탄 지 5분여 만에 나타난 섬은 슬퍼 보이지 않았다. 오솔길은 아늑했다. 야생화와 버섯에선 맑은 기운이 흘렀다. 고모는 젖은 땅에 무릎을 꿇고 야생화를 꺾어 꽃다발을 만들었다. 소녀는 소박한 버섯 하나를 떼내 가슴에 품었다. “처음 만나는 나환자에게 줘야지.”

이윽고 중년의 나환자 앞에 섰다. 한쪽 눈은 움푹 패어 있었다. 약지는 마디 하나가 없었다. 소녀는 가슴에 고이 모셔놨던 버섯을 떨어뜨렸고, 고모 뒤에 작은 몸을 숨켰다. 1979년 초여름. 소녀의 눈에 비친 그 섬은 슬펐다.

▲ 나환자에게 버섯을 선물했던 소녀는 이제 폐지를 줍는 어르신들을 위해 버섯을 키운다. [사진=오상민 작가]

# 2장. “고마워요! 꼬마 아가씨”

그날 밤. 소녀는 고모 품을 떠나지 않았다. 두려움이 소녀의 심장을 조인 탓이었다. 소녀에게 고모는 귀엣말을 했다. “오솔길에서 야생화 봤지. 어땠어?” 소녀가 고개를 들자 고모는 말을 이었다. “야생화는 혼자 자라는 게 아니야. 주변에 뿌리를 내린 버섯들로부터 양분을 받지. 버섯 같은 미물도 그렇게 나눠주면서 산단다. 마음을 한번 줘보거라. 나환자와 우리는 다르지 않아.”

다음날 새벽. 소녀는 문밖으로 얼굴을 빼꼼히 내밀었다. 중년의 나환자가 보였다. 한걸음 내디뎠다. 나환자가 빙긋 웃었다. 네댓발 더 나아가 꽃 같은 버섯을 건넸다. “고맙습니다. 꼬마 아가씨!” 나환자는 조용히 말을 걸었고, 소녀는 수줍은 미소로 답했다.

소록도를 떠나는 날, 중년의 나환자는 소녀를 배웅했다. 소녀는 다음해, 그 다음해에도 그를 보러 소록도를 찾았다. 그의 눈은 갈수록 파이고, 약지는 점점 짧아졌지만 소녀는 불편하지 않았다. ‘마음을 나누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어렴풋이 깨쳤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 섬은 슬프지 않았다.

▲ 신미자 원장이 버섯과 꽃을 조화롭게 배치한 버섯정원을 만들고 있다.[사진=오상민 작가]
▲ 버섯과 식물은 좋은 짝이다. 버섯은 식물에게 양분을 나눠주고 이산화탄소를 배출해 식물이 활용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3장. 빈 상자가 뭐기에 …

“내 상자라니까, 이 할마씨야!” 머리채를 서로 붙잡은 두 할머니는 고성을 질러댔다. 팔아봤자 70~80원밖에 안 되는 ‘빈 상자 1㎏’을 둘러싼 다툼이었다. 어렵게 마련된 ‘폐지廢紙 줍는 어르신을 위한 원예무료강의(2013년)’는 아수라장이 됐다. 강사는 몹시 당황했다. 정성스럽게 포장했던 ‘꽃ㆍ화분(텃밭) 상자’가 싸움의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훌쩍 흐른 2013년, 소록도의 그 소녀는 ‘아름다운 중년’이 됐다. 약자를 위한 일이라면 소매를 걷어붙였다. 지원금이 부족하면 사비私費를 털어 보탰다. 힘없는 이들에게 일자리를 나눠주기 위해 사회적기업 ‘지엔그린(조경전문회사)’까지 세웠다.

그런 그에게도 난제가 있었다. 험한 거리에서 폐지를 줍는 어르신을 돕는 일이었다. 딱히 방법이 없었다. 지엔그린이 ‘일자리 창출형’으로 사회적기업 인증(2013년)을 받았음에도 별 기술도 없는 어르신을 고용할 순 없었다. 그건 공멸의 길이었다.

차선책으로 ‘새 리어카’를 선물하는 이벤트를 열어봤지만 영 개운치 않았다. ‘좋은 리어카 드렸으니 안심하고 거리로 나가세요’라면서 어르신의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방향을 바꿔 진행한 ‘교육 프로그램’들의 반응도 신통치 않았다. 폐지를 주워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어르신에게 교육은 ‘한갓진 담론’일 뿐이었다.

두 할머니가 거칠게 다툰 2013년 원예무료강의가 딱 그런 모습이었다. 도떼기시장으로 바뀐 강의실에서 그는 상념에 잠겼다. “어찌해야 할까, 방법이 없을까.”

▲ 신미자 원장은 어르신들과 청소년들에게 지속적으로 원예 수업을 하고 있다. [사진=여월농업공원]

#4장. 버섯, 나눔의 미학

“버섯 배지培地(식물이나 세균을 기르는 데 필요한 영양소가 들어 있는 고체)를 감싼 비닐은 조금만 자르세요. 그래야 표고버섯이 예쁘게 올라와요. 잘 아시죠?(웃음)” “응, 아는데 잘 안 되네. 손에 익으면 잘 할 수 있겠지(웃음).”

그로부터 5년이 흐른 2018년 3월 부천 여월농업공원의 버섯 재배사. 각각 165㎡(약 50평) 규모의 비닐하우스 4동에선 표고ㆍ흰목이ㆍ송화ㆍ노루궁뎅이ㆍ느타리버섯이 재배되고 있다.

까다로운 버섯을 애지중지 키우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폐지를 주워 생계를 꾸리던 어르신이다. 하루 6시간 정성스럽게 물을 주고 배지를 관리한다. 버섯과 어르신을 연결한 이는 소록도의 그 소녀 신미자(58) 여월농업공원 원장(지엔그린 대표)이다.

새 리어카의 모순, 한갓진 담론의 역설, 두 할머니의 몸싸움 등 숱한 시행착오 끝에 그는 폐지 줍는 어르신을 위한 일자리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버섯 재배사 4동은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만들었다.

▲ 어르신들은 버섯을 키우며 웃음을 찾았다. 일자리 창출의 모범적 사례다. [사진=오상민 작가]

신 원장은 “김만수 부천시장, 김종석 전 경기도의원의 관심과 노력이 없었다면 버섯 재배사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말을 이었다. “표고버섯은 월 600㎏, 송화버섯과 느타리버섯은 각각 300㎏ 생산해요. 흰목이버섯과 노루궁뎅이는 8000송이씩 재배하죠. 이를 판매해 남은 수익은 급여 형식으로 어르신에게 드립니다.”

여름엔 뙤약볕, 겨울엔 된바람을 맞으며 폐지를 줍던 어르신들은 마냥 고맙고, 행복하다. 한 어르신이 말했다. “온종일 거리에 있을 땐 죽을 날만을 기다렸어요. 아내가 저 세상으로 간 다음엔 더 그랬죠. 리어카를 끌때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자괴감도 들었죠. 버섯을 재배하면서 달라졌어요. 요즘은 분수에 안 맞게 희망도 품습니다(웃음).”

많은 이들은 “큰일을 해냈다”며 신 원장을 치켜세운다. 정작 그는 “나누는 건 당연하다.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손사래를 친다. “나무는 영양분의 40%를 뿌리에서 받아요. 그중 10%는 버섯이 건넨 영양분이죠. 버섯의 균사체가 흙 속 영양분을 결합해 뿌리에 주는 겁니다. 그런 버섯처럼 살고 싶었어요. 무언가를 나눠주는 버섯처럼요.”

쉬운 길이 아니었다. 신 원장의 선의善意는 종종 왜곡됐고, 넘치는 정情은 때마다 악용됐다. 교활한 사람들에게 짓씹혀 몹쓸병(실어증)에 걸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선의를 잃지 않았다. ‘착한 마음은 착해서 당한다’는 고약한 역설을 깨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스쿠프와 천막사진관이 그의 인생을 들여다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계추를 1987년 4월로 돌린다. 꼬마 사과도둑을 우연히 만난 날, 그의 인생은 다시 시작됐다. 소록도에 이은 두번째 변곡점이었다.

▲ 버섯은 신비한 생명이다. 엊그제 핀 것 같은데 돌아보면, 아름다움을 뽐낸다. 외로움을 타는 어르신들은 그래서 버섯을 아이 다루듯 한다. [사진=오상민 작가]
▲ 부천 여월농업공원의 버섯 재배사. 경기도와 부천시의 지원을 받아 만들었다. [사진=오상민 작가]

# 5장. 새댁과 꼬마도둑

그해 4월 어느날. 새댁이던 신 원장은 부천의 한 시장을 거닐며 입지를 살피고 있었다. 처녀 때 직업을 살려 주산학원을 해볼 생각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신 원장의 눈에 ‘더벅머리 꼬마’가 잡혔다. 과일가게에서 사과를 훔친 꼬마는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다.

30여m를 쫓아간 그는 꼬마의 등을 살짝 쳤다. “얘, 그 사과 네 것 아니지?” 꼬마는 날을 세웠다. “왜요? 아줌마 것도 아니잖아요!” 신 원장은 꼬마의 손에서 사과를 빼앗아 한입 베어 물었다. “어때, 이제 아줌마도 공범이야. 얘기 좀 하자. 학교는 안 가니? …”

공범이라는 말에 혹했는지 꼬마는 말을 술술 풀어냈다. “전 초등학교 3학년이에요. 동생은 1학년이구요. 아빠는 맨날 술만 먹어요. 엄마는 춤바람 나서 집에 안 들어오구요.”

이 꼬마, 참 덤덤했다. 자격 없는 부모에게 입은 상처를 억누르는 게 천성이 돼버린 듯했다. 신 원장은 꼬마의 손을 잡았다. “네 집 한번 구경시켜 줄래?” 꼬마의 고사리손을 타고 설렘이 넘어왔다. “이 녀석, 엄마 손을 느낀 지 오래됐구나.”

꼬마의 집은 반지하였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남자가 보였다. 아빠였다. 엄마가 집을 오래 비운 탓인지, 소줏병과 빨랫감이 널브러져 있었다. 신 원장은 그날 꼬마가 다닌다는 초등학교를 무작정 찾아갔다.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있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선생님의 답은 예상을 빗나가지 않았다. “그런 걸 운영할 여유는 없습니다.” 주산학원을 운영할 참이었던 그는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갈 곳 없는 아이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만들자. 어른들이 너무 무책임하다.” 어느덧 밤이 됐다. 찬바람이 엉켜들었다. 반지하 집이 춥진 않을까. 꼬마가 생각났다. 몸이 떨렸다. 눈물 때문이었다.

▲ 버섯은 아이와 같다. 생김새도 성장속도도 제각각이다. 위에서부터 송화버섯, 느타리버섯, 노루궁뎅이버섯, 표고버섯. [사진=오상민 작가]

# 6장. “엄마 싫어, 엄마만 가!”

선의善意(좋은 뜻) 하나로 세상을 바꾸는 건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돈ㆍ재물ㆍ탐욕 앞에서 선의는 무기력할 때가 많다. 신 원장이 맞닥뜨린 현실도 그랬다. 동네 학원 원장들은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무료 교실을 함께 만들자’는 신 원장의 선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공간이 없다’는 이유를 댔지만 ‘돈도 안 되는데 왜 해’라는 속이 빤히 읽혔다.

신 원장이 부천 춘의동에서 제법 큰 학원을 발견한 건 실망감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였다. 들어가보니 2~3개 교실을 리모델링하고 있었다. 원장을 찾아가 뜻을 건넸다. 원장은 시원시원했다. “취지가 좋군요. 한번 해보세요. 단, 리모델링 기간만입니다.”

인근 초등학교에 ‘무료 방과 후 교실’ 소식을 알렸다. 30여명이 모였다. 더벅머리 꼬마와 그의 동생도 있었다. 커리큘럼은 따로 없었다. 국어든 주산이든 즐겁게 가르쳤다. 야트막한 산에 올라가 꽃내음을 맡는 것도 교육이라면 교육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오전 11시. 신 원장의 집에 전화가 걸려왔다. 꼬마였다. “선생님, 지금 빨리 집으로 와주실 수 있어요? 아빠가 없는 틈을 타서 엄마가 가구를 빼내가고 있어요.” 얼마나 빠르게 달렸는지 모른다. 발만큼 마음도 급했다.

꼬마의 집은 엉망이었다. 낯선 남자와 함께 온 엄마는 세간을 빼내 용달차에 싣고 있었다. 꼬마는 멍하니 서있었고, 꼬마의 동생은 책상다리를 붙들고 펑펑 울고 있었다. “책상은 놔둬! 엄마 싫어, 엄마만 가!” 고작 8살이었다. 그런데도 동생은 엄마가 아닌 책상다리를 붙잡고 있었다. 모성母性을 잃은 엄마는 눈을 흘기며 용달차에 올라탔다.

신 원장은 눈물이 솟구치는 걸 애써 눌렀다. “그래, 엄마가 건강해야 한다. 엄마가….” 그날 밤, 정처 없이 걸었다. 속이 복잡해 어쩔 수 없었다. 어디쯤일까. 고개를 드니 ‘매물賣物’이라는 글씨가 붙어 있는 꽃꽂이학원이 보였다. 지하에 꽃마차 카바레가 있는 빌딩의 2층이었다. 카바레에 꽃꽂이학원이라…. 춤바람 난 엄마의 얼굴이 스쳤다. 그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 신미자 원장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휴대전화이고 하나는 장갑이다. 여기저기서 찾는 전화가 끊임없이 울린다. [사진=오상민 작가]

#7장. 간교한 세상의 늪

그날로 꽃꽂이학원을 인수해 중앙아트문화원(1987년)을 만들었다. 주산학원을 차리려 모아놨던 종잣돈을 털었다. ‘일하는 여성은 행복하다’를 모토로 삼은 신 원장은 요일별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월요일 꽃꽂이, 화요일 홈패션, 수요일 지점토 등이었다. 별다른 주부교실이 없던 시절, 소문은 금세 퍼졌다. 반년 만에 회원이 100여명으로 증가했고, 분점(원미동ㆍ중동)도 생겼다.

공익사업도 조금씩 늘어났다. 독거노인 등 취약계층에게 여유를 선물하기 위해 부천시 문화학교(1995년)를 개설했다.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엔 은퇴자ㆍ명퇴자를 재교육하는 기관(열린사회교육원ㆍ1998년)을 세웠다.

같은해 국내 최초 조경학원도 설립했다. 조경기능사를 양성하는 곳이었는데, 실기를 연습할 수 있는 실습장과 견습이 가능한 조경회사도 있었다. 정리해고ㆍ명퇴 등을 이유로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이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조경기능사를 따기 위해선 필기와 실기를 통과해야 해요. 그런데, 실습할 곳이 마땅치 않았죠. 조경회사를 찾아다니면서 부탁했지만 열이면 열 거절했어요. 그래서 부천 당아래사거리(75번 버스 종점) 부근에 실습장을 만들고, 조경회사를 별도로 세웠어요.”

▲ 여월농업공원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버섯재배전문가 양성과정은 그중 하나다. 지난 2월에 열린 개강식에서 신미자 원장이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오상민 작가]

시장을 차츰차츰 넓히자 그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단체의 장長을 맡아달라’는 요청도 쏟아졌다. 부지불식간에 명함이 9개가 됐다. 후유증은 금세 나타났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신 원장을 악용하려는 이들이 꼬였다. 간교한 사람들이 더러운 판을 열고 있었다.

#8장. 죽음보다 독한 치욕

거절을 몰랐던 그는 시간에 쫓겼다. 조경회사는 물론 조경학원도 운영하기 어려워졌다. 어쩔 수 없이 ‘곁에서 일하게만 해달라’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실무를 나눠줬다. 그중엔 조경학원 부원장도 있었다. 믿음직했다. 부원장이 일을 맡은 후 수강생이 크게 줄었음에도 신 원장은 괘념치 않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부원장은 딴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원장 행세를 하면서 회원들을 서울로 빼돌렸다. 부원장의 검은속을 눈치챘을 땐 수개월이 흐른 뒤였다. 손실을 피할 수 없었다. 조경회사도 난관에 부닥쳤다. 남성들의 세상 ‘조경판’에서 신 원장은 그냥 여자일 뿐이었다. 로비ㆍ술자리 등을 요구하는 상습적인 무례가 판쳤다. 간신히 일감을 얻으면 현장 감독자가 맘대로 돈을 뗐다.

현실은 진흙탕이었고, 신 원장은 허수아비였다. 학원은 학원대로, 회사는 회사대로 적자가 났다. 삶이 힘겨워졌다. 99㎡(약 30평) 아파트를 어쩔 수 없이 내다팔고, 단칸방으로 밀려났다. 2005년 11월. 신 원장은 단칸방으로 이사한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죽음보다 독한 치욕을 맛봤기 때문이다.

“단칸방에 들어가지 못한 세간들이 많았어요. 길 한쪽에 내놨더니 서로 가져가겠다며 싸우더라구요. 몸싸움까지 하면서….”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그는 말을 잃고 있었다.

▲ 버섯은 배양기(90일)을 보내면 생육기(45일)에 들어간다. 생육기에는 신경써야 할 게 한두개가 아니다. 1~2시간마다 물을 줘야 한다. 신미자 원장은 이 기간에 버섯 재배사 옆 사무실에서 쪽잠을 잔다. [사진=오상민 작가]

# 9장. 말 없는 친구, 야생화

단칸방에서 신 원장은 끙끙 앓았다. 자책과 원망이 온종일 그를 괴롭힌 탓이었다. 그럴수록 말문은 더 닫혔다. 실어증이었다. 이곳에 온 지 5일째, 단칸방에서 나온 그는 무작정 ‘75번 버스’에 올라탔다. 자신이 만든 조경실습장(솜다리자연학교)이 그 버스의 종점에 있었다. 500여종의 야생화가 피어 있는 곳, 바쁘다는 이유로 한달에 한번 갈까 말까한 곳…. 거기에 가고 싶었다.

낡은 의자를 놓고 앉았다. 봄 야생화가 보였다. 생명이 끊긴 듯 가지가 앙상했다. 짓밟히고 꺾인 꽃도 많았다. “아팠겠구나. 보살펴주지 못해 미안해.” 마음의 소리를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말 못하는 사람의 친구는 말 못하는 꽃뿐이었다.

실습장을 홀로 오간 지 4개월, 봄바람이 불었다. 야생화도 싹을 틔웠다. 돌 틈새를 뚫고 싹을 올린 들꽃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신 원장의 말문도 열렸다. 자책ㆍ원망ㆍ한심…. 그를 괴롭히던 마음의 짐이 치유된 덕분이었다. 하필 그 무렵, 75번 종점이 ‘지하철 부지’로 선정된 탓에 실습장을 낯선 산자락(부천 여월동)으로 옮겨야 했지만 신 원장은 괜찮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다.”

길도 없고, 인적도 뜸한 옛 동불사 옆자리. 신 원장은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야생화를 옮겨심었다. 절 입구에도 씨앗을 뿌렸다. 산자락 속 자생식물원, 그의 꿈이었다. 꽃에 물을 주던 신 원장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봤다. 펜스 너머로 낡은 건물과 메마른 땅이 보였다. 부천에 20여년 살았지만 처음 보는 곳이었다. “대체 뭐하는 곳일까?”

▲ 2005년께 신미자 원장은 사람들에 치여 실어증에 걸렸다. 신 원장은 “말 못하는 사람의 친구는 말 못하는 식물뿐이었다”고 말했다. [사진=오상민 작가]

#10장. 풍요 속 비극

산자락에 식물원이 생기자 사람이 모였다. 말문이 트인 신 원장도 기운을 냈다. 동네 어르신, 초등학교 학부모들에게 생활원예를 가르쳤다. 덩달아 산자락 아래 ‘죽은 땅’에도 관심이 쏟아졌다. 알고 보니, 2001년 가동을 멈춘 ‘여월정수장’이었다. 정수장이 쓸모없게 되자 5만㎡(약 1만5000평)의 땅도 가치를 잃은 셈이었다.

‘여월정수장을 사랑하는 모임(여정사모ㆍ2011년)’이 만들어졌다. 5~6개 단체가 힘을 합쳤다. 죽은 땅을 녹지나 공원으로 만들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부천시는 ‘(여월정수장의) 재활용 정비 계획안’으로 응답했다.

2012년 정비를 마친 여월농업공원은 2013~2014년 ‘시민의 힘’으로 운영됐다. 시민운영단의 대표는 신 원장이었다. 그는 시민들과 죽은 땅을 일궈나갔다. 공동체텃밭을 만들고, 씨앗을 뿌렸다. 엽체류와 과채류가 영글면 함께 먹고, 나눴다.

▲ 여월농업공원은 생태교육의 장으로 손꼽힌다. 도시양봉, 추석 송편빚기 체험, 토종 벼수확, 텃밭 수확축제, 천연벌레기피제 만들기, 배추, 무 모종 심기(왼쪽 위부터 순서대로). [사진=여월농업공원]

상반기엔 상추ㆍ고추를 수확해 취약계층에 건넸다. 하반기엔 배와 무로 김장김치를 만들어 독거노인에게 전달했다. 죽었던 땅은 그렇게 시민과 세대를 아우르는 공간이 됐다. 여월농업공원은 생태교육의 장場으로 거듭났다.

신 원장의 헌신, 시민들의 참여, 부천시와 70여개 민간공동체(동아리)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여월농업공원에서 희망만 빚어진 건 아니었다.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폐지 줍는 어르신도 늘어났다. 빈 상자 등 폐지가 크게 증가한 탓이었다. 풍요 속 비극이었다.
 
# 11장. 버섯된장, 그리고 꿈

대책을 세우지 않은 건 아니었다. 2013년 두 할머니의 싸움을 눈앞에서 목격한 신 원장은 ‘버섯 재배’를 폐지 줍는 어르신의 일자리로 연결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배양기(90일), 생육기(45일)를 버텨낸 버섯은 키우는 게 어렵지 않아요. 그래서 폐지 줍는 일을 대체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버섯 재배’를 생각했죠. 꽃 같은 버섯이 어르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것이라는 기대감도 있었어요.”

하지만 버섯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습도ㆍ온도 등을 맞추는 건 쉽지 않았다. 배지와 흙도 예민한 문제였다. 신 원장은 노력과 비용을 투입했다. 경기도 버섯농가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노하우를 배웠다. 이동식 버섯재배사(스마트그로워)를 개발하는 데도 힘을 쏟았다. 그가 창업한 사회적기업 지엔그린(조경전문회사)이 뒤를 받쳤다. 결실은 3년 만에 나왔다.

“2016년 스마트그로워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어요. 이를 통해 최상급 버섯을 재배했죠. 그 버섯들을 취약계층에 나눠줬는데 반응이 좋았죠. 그 무렵, 경기도와 부천시가 여월농업공원에 ‘버섯 재배사’ 4동을 짓겠다고 결정했어요. 이제 폐지 줍는 어르신을 모실 수 있겠구나 싶었죠.”

▲ 버섯은 온도, 습도, 바람 등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버섯을 애지중지 재배해야 하는 이유다. [사진=오상민 작가]

숙원宿願을 풀었지만 신 원장의 과제는 숱하다. 무엇보다 버섯만으로 어르신의 일자리를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여월농업공원의 버섯 재배사 4동에서 키운 버섯을 모두 팔아도 월 200만~400만원밖에 남지 않아서다.

이 정도 수익으론 어르신에게 임금을 제대로 줄 수 없다. 신 원장이 사비를 탈탈 털어가며 이 사업을 끌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신 원장은 꿈을 접을 생각이 없다. “버섯 산출량을 늘릴 거예요. 새로운 버섯제품도 준비하고 있구요. 폐지 줍는 어르신을 거리로 내모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여월농업공원의 버섯 재배사에서 산출되는 버섯을 모두 팔아도 어르신들의 인건비를 충당하기 힘들다. 신 원장이 새로운 버섯제품을 론칭하려 애쓰는 이유다. 사진은 버섯된장의 모습. [사진=오상민 작가]

지난 3월 16일 여월농업공원에선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버섯된장’ 담그기였다. 장독대에 묵혀 놓은 된장을 버섯에 버무려 다시 숙성하는 이벤트였다. 신 원장이 기획한 새 상품이었다. “예전 시골집에 아담한 장독대가 있었어요. 엄마는 된장찌개를 끓일 때 장독대 주변에 있는 버섯을 따서 넣었죠. 그 맛을 잊지 못해요. 엄마의 맛을 폐지 줍는 어르신을 위해 알리고 싶어요.”

장독대를 뛰노는 소록도 소녀가 떠올랐다. 나환자가 웃고 있었다. 꼬마가 고사리손을 흔들었다. 그래, 버섯처럼…. 신 원장이 미소를 머금었다. 소녀가 소박한 버섯을 들고 있었다.
=이윤찬 더스쿠프 기자
chan4877@thescoop.co.kr

사진
=오상민 천막사진관 작가
studiotent@naver.com

▲ 버섯 재배사에서 일하는 어르신들. 신 원장은 버섯을 일자리 창출의 아이템으로 만들었다. [사진=오상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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