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시카리오❺

영화 ‘시카리오’의 마지막 장면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렬하다. 멕시코 신흥 마약조직 소라노 카르텔에게 가족을 몰살당한 알레한드로는 미국 원정대의 앞잡이로 나서 복수극을 완성한다. 소라노 카르텔의 두목 알라르콘의 저택에 들어가 그가 보는 앞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사살하고 죽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지켜보게 한 후 사살한다.

 

알레한드로는 소라노 카르텔의 두목 알라르콘의 동생이자 2인자인 디아즈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알라르콘의 대저택까지 진입한다. 그곳에서 쓸모없어진 디아즈를 사살한 후 알라르콘의 경호원들마저 차례로 제거하며 전진한다. 빈틈도 흔들림도 없다. 과연 ‘시카리오(암살자)’답다.

그렇게 알레한드로는 알라르콘과 대망의 결승전을 펼친다. 그는 마약으로 벌어들인 떼돈으로 베르사유 궁전급의 치장을 한 저택에서 왕후장상처럼 가족과 식사 중인 알라르콘의 식사 테이블에 불청객으로 자리한다. 알라르콘은 그 상황에서도 ‘마약왕’답게 품위를 잃지 않는다. 베르사유 궁전에 들어간 ‘폭도’들 앞에서도 황제의 품위를 지켰던 루이 14세의 근엄함을 닮았다.

알라르콘은 식사를 멈추지 않은 채 폭도 알레한드로에게 “가족과 식사 중인데 이 무슨 짓이냐”고 점잖게 질책한다. 가족은 살려줄 수 없겠느냐는 마지막 선처를 품위 있게 호소한다. 알레한드로 역시 시카리오의 왕답게 품위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대답한다. “너도 나의 가족과 수많은 가족들을 죽이지 않았는가?” 이 말과 함께 알라르콘 앞에서 그의 아내와 아들을 사살하고, 그 순간을 몇초간 지켜보게 한 후 사살한다. 그렇게 복수극을 완성한다.

▲ 가족과 가정은 세상의 유일한 안식처이면서 나를 가두는 감옥이기도 하다.[사진=더스쿠프 포토]

타란티노 감독의 복수극처럼 피가 낭자하진 않지만 그보다 더욱 잔혹하다. 가족의 비명횡사를 지켜보게 하는 것보다 잔혹한 복수가 있을까. 알라르콘은 가족의 죽음을 지켜보고 단 몇초 후에 죽을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알레한드로의 사무친 원한도 따지고 보면 알라르콘에게 자신의 조직이 무너져서가 아니라 가족을 잃었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그런 것이다.

소라노 카르텔의 ‘돈세탁’이라는 위험천만한 일을 하는 젊은 여자도 아기의 우윳값을 마련하기 위함이고, 멕시코 국경 고속도로에서 감히 미국의 델타포스에게 총구를 겨누던 소라노 조직원들도 모두 가족 부양의 책임을 진 젊은 가장들일 것이다. 경찰과 마약조직을 오가며 ‘투잡’을 뛰는 멕시코 경찰 실비오도 어린 아들의 축구를 열렬히 응원하고 후원하는 가장일 뿐이다.

소라노 조직의 푼돈을 받아 아들의 축구를 후원하던 실비오는 결국 알레한드로에게 사살당한다.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은 모든 규범과 윤리와 합리성을 간단히 넘어선다. 가족 때문에 살고 가족 때문에 죽기도 한다. 가족이 나를 살리고 가족이 나를 죽이기도 한다.

흔히 ‘부르주아 가족(Bourgeois family)’이라고 불리는 현대 산업사회의 가족 제도는 18세기 산업혁명의 소산이다. 산업화ㆍ도시화에 따라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가 해체되고 도시로 이주한 노동자들은 가족을 보호해줄 대가족의 울타리가 없다. 도시 노동자들에게 딸린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은 전통적인 가족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거리의 부랑자가 되어 사회불안의 진원이 된다.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영국 빅토리아 왕조는 가족을 보호대상으로 법적인 규정을 하지만 국가 재정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빅토리아 왕조는 가족에게 노인과 어린이의 보호와 교육과 부양 책임을 슬그머니 넘긴다. 현대 산업사회 ‘부르주아 가족’ 탄생의 기원이다.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 가족은 분명 달콤하다. 그러나 독설로 유명한 일본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은 ‘가족이란 남들이 안 볼 때 내다버리고 싶은 존재’라는 가족의 불편한 진실을 말한다. 가족과 가정은 세상의 유일한 안식처이면서도 나를 가두는 감옥이기도 하다.

▲ 사교육 때문에 등골이 휘고 치매 부모 봉양에 휜 등골이 마침내는 부러진다.[사진=뉴시스]

대통령들이 모두 가족 때문에 욕을 보고 자살로 내몰리기도 하고 감옥에 간다. 또 한명의 전직 대통령이 세간에 나돌던 가족 이름을 뒤로 하고 검찰청 포토라인에 섰다. 대통령도 가족의 족쇄와 감옥에서 헤쳐나오기 힘든 모양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먹먹하다. ‘부패경찰’로 죽어간 멕시코 경찰 실비오의 어린 아들이 흙먼지 날리는 동네축구 대항전에서 열심히 뛴다. 남편을 잃은 젊은 엄마가 홀로 열심히 응원한다. 그렇게 아이는 축구선수의 꿈을 이어간다.

우리는 모두 현대 ‘부르주아 가족제도’의 소산이다. 그것이 특별한 사람이든 보통사람이든, 크고 작은 비리와 부정부패 한 점 없이 키우고 교육시켜 사회로 내보낸 자식들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기에는 그 책임이 너무나 버겁다. 사교육비 때문에 등골이 휘고, 치매 부모의 봉양에 휜 등골이 마침내는 부러진다. 그 모두 사실은 빅토리아 왕조가 슬그머니 개인에게 미뤄버린 국가의 책임이 아닌가.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저작권자 © 더스쿠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