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산업혁명과 신기술, 그리고 융복합

 

▲ 복잡한 최첨단 기술이 범용화되려면 ‘융복합 연구법’이 필요하다.[사진=뉴시스]


세간의 이슈를 끌었던 신기술 중 ‘범용화’에 성공한 게 얼마나 될까. 일일이 따져보면 별로 없을 것이다. 과학기술이 빠르게 진화했음에도 신기술의 ‘범용화 기간’이 늘어난 까닭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신기술의 목적과 방법이 학문을 넘나들 정도로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융복합이 필요한 시대가 왔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하지만 학문 간 융복합은 너무도 요원하다.

아무리 참신한 슬로건도 몇번 듣다보면 진부해진다. 특히 과학기술계에선 이런 일이 흔하다. 문제는 지나치게 앞서나간 슬로건이 진부해지면 아직 꽃도 피우지 못한 관련 기술까지 추진력을 잃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세상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을 것처럼 이슈를 끌었던 ‘유비쿼터스’ ‘나노테크놀로지’ ‘신재생에너지’ ‘가상현실’ ‘인공지능’ ‘3D 프린팅’ 등과 관련된 기술들이 얼마만큼 범용화됐는지 생각해봐야 하는 이유다.

범용기술(General Purpose Technology)의 정의는 쉽다. 18세기 증기기관, 19세기 철도와 전기, 20세기 초 자동차, 20세기 후반 컴퓨터와 인터넷 등이 범용기술이다. 전대미문의 신기술이었던 이들은 오랜 세월 많은 분야에 적용되면서 당연한 기술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최근의 범용기술은 뭔가 다르다. 정보의 비약적인 확산, 과학기술을 맹신하는 분위기 탓인지 어제 나온 신기술이 마치 ‘범용기술’처럼 여겨지는 풍토가 생겼다. 가령, 나노테크놀로지의 유행기에는 대량생산 등 난제들을 외면한 채 ‘우주엘리베이터’ ‘자기조립 나노기계’ 등 어려운 기술이 금방이라도 실용화할 것처럼 이슈를 끌었다. 3D 프린팅이 화제를 불러일으키자 그 기술을 이용해 어떤 것도 만들어본 적 없는 이들이 “전통적인 제조업의 시대는 갔다”면서 흥분했다.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창업을 하려는 이들은 수많은 아이디어를 킥스타터(Kickstarter), 인디고고(Indiegogo) 등에 올린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 중 성공한 예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산소를 실시간 전기분해를 통해 물속에서 추출해 숨쉴 수 있는 휴대용 인공 아가미’처럼 기본적인 물리법칙마저 무시한 황당한 아이디어에도 100만 달러 가까운 투자가 몰릴 정도로 대중은 과학기술을 무조건적으로 낙관한다.

그렇다면 질문 하나. 과학기술이 그토록 향상됐다면 신新기술의 범용화 주기는 짧아져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런데도 최첨단 기술의 범용화가 늦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답은 간단하다. 과거엔 무한동력 공급(증기기관), 이동시간 단축(자동차), 계산 자동화(컴퓨터)처럼 기술의 목표가 뚜렷했고, 원리는 단순했다. 당연히 이 기술들은 여러 분야에 적용하는 것도 쉬웠고, 대규모 분산 연구(투자)를 통해 범용화가 이뤄졌다.

18~20세기 신기술 vs 21세기 신기술

최근의 기술은 다르다. 비전공자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만큼 어렵다. 그러다보니 연구 분야별 고립현상이 발생, 기술개발 자체가 목적이 돼버렸다. 이럴 때 유효한 도구가 될 것 같았던 ‘융복합 연구방법’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한 예로 많은 사람들은 의류학ㆍ섬유공학ㆍ컴퓨터공학ㆍ기계공학 분야의 연구자들이 자주 만나면서 각자의 연구결과를 교류하면 당장이라도 ‘스마트 의류’가 쏟아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이는 일장춘몽一場春夢에 그쳤다.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은 소통하지 못했고, 기술 또한 융복합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학문과 학문을 가로 막는 벽이 융복합을 막은 셈이다.

필자는 의류학과 대학원에서 연구 환경에서 상당히 중요한 프로그래밍 강의를 하고 있다. 하지만 수강생 대부분은 프로그래밍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다. 그래서 필자는 수강생의 눈높이에 맞춘 교재를 만들었지만 뜻밖의 문제에 부닥쳤다. 의류학 서적 출판사는 “의류학과에서 왜 프로그래밍을 배우냐”고 핀잔을 놓고, 컴퓨터 서적 출판사는 “의류학과에서 왜 프로그래밍을 왜 가르치냐”고 딴지를 걸었다. 이런 인식이 근간에 깔려 있다면 ‘융복합 연구’는 불가능하다.
 


물론 “전공 간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는 주장은 과격하다. 다만 드나들 수 있는 작은 문 정도는 있어야 한다. 융복합 연구를 원하는 연구자라면 최소한 그 문을 드나드는 데 필요한 통행료 수준의 다른 분야 지식을 갖춰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신기술들을 범용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나비의 비유’로 일약 가상현실의 아이콘이 된 장자莊子는 ‘융복합연구’의 선구자였다. 어느 날 혜자惠子가 장자에게 “당신의 말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놀리자, 장자는 “당신이 서있는 땅 한조각을 제외한 쓸모없는 주변땅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라고 되물었다.

한 사람이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가능했다. 지금은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없다. 배타적인 학문 사이에 놓인 벽에 문을 만들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만큼의 지식을 배우는 수고를 아끼지 않을 때, 진정한 융복합 연구의 길이 열리고, 신기술 개발에도 추진력이 생긴다.
김성민 서울대 의류학과 교수(생활과학연구소 겸무연구원) sungmin0922@snu.ac.kr│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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