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❶

코엔 형제(조엘 코엔ㆍ에단 코엔)가 감독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ㆍ2007)’는 그해 아카데미상 최우수 작품상, 감독상 그리고 조연상을 휩쓸며 근래 보기 드문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영화제 수상이나 평론가들의 찬사가 흥행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흥행의 저주’가 되기도 한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흥행의 저주를 피해가기는 어려웠던 듯 ‘망작’까지는 아니지만 다소 초라한 성적을 냈다. 범죄 스릴러물이지만 범죄자들끼리 쫓고 쫓기고, 그 사이에 정의의 사도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특별히 누구에게 분노하거나 응원할 기분도 아니다. 화끈한 총격전이나 살육전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고, 한 도시나 마을을 통째로 부수고 날려버리면서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컴퓨터 그래픽도 없이 그저 먼지 바람 나는 따분한 텍사스 사막의 실사實寫로 일관한다.

뭔가 여러 가지 해답 없는 질문들을 던지는 듯한 느낌에 관람이 편치 못하다. 요즘 관객 취향이 아니다. 어찌 보면 망할 작정하고 만든 영화 같은데 그나마 살인마 안톤 역으로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은 하비에르 바르뎀(Javier Bardem)이 망작은 면하게 해준 듯하다. 바르뎀이 분명 이 영화의 주연 같은데 조연상을 받은 것도 조금은 의아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제목부터가 조금은 어지럽다. 코엔 형제가 붙인 제목은 아니다. 영화는 코맥 매카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매카시는 소설 제목을 아일랜드의 시성詩聖쯤으로 여겨지는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Sailing to Byzantium)’의 첫 구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에서 따온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은 코맥 매카시의 동명 소설이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비잔티움은 로마의 영광을 잇는 신세계의 새로운 영광과 완성의 상징이다. 1920년대 대영제국의 영광이 저물어갈 무렵 예이츠는 젊은이들이 비잔티움과 같은 새로운 영광의 또 다른 완성을 향해 나갈 것을 희망한다.

“그곳은 노인들이 살 곳이 아니다. 젊은이들은 서로의 팔짱을 끼고 사라져가는 세대인 나무 속에서 사라져가는 세대를 멋대로 지저귄다. 바다는 연어와 고등어로 넘쳐나고, 잉태되고 태어나고 죽어가는 물고기, 짐승, 새들 무엇이건 여름 내내 찬미한다. 그 펄펄 끊는 음악에 취해 모두 기념비적인 영원불멸의 지혜는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That is no country for old men. The young/In one another’s arms, birds in the trees? Those dying generations? at their song/The salmon-falls, the mackerel-crowded seas/Fish, flesh, or fowl, commend all summer long/Whatever is begotten, born, and dies./Caught in that sensual music all neglect monuments of unageing intellect).”

예이츠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말로 자신의 세대와 그 이전 세대가 품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젊은 세대를 개탄한다. 또한 그러면서도 물질적 풍요에 취해 지난 세대에서 지혜를 구하려 들지 않고 그들을 비웃는 젊은 세대를 개탄한다.

영화의 배경은 1980년 미국 텍사스다. ‘위대한 미국’을 건설한 세대로 은퇴를 코앞에 둔 노형사 벨(토미 리 존스)은 평화로운 마을에서 마약상들끼리 벌인 집단 살해 현장을 보고 할 말을 잃는다. 연이어 고압 산소통을 들고 돌아다니며 총알 흔적도 없이 고압 산소로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안톤(하비에르 바르뎀)의 전대미문의 살인 행각에 무기력해진다.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며 침통하게 고백한다.

▲ 청년들은 ‘비잔티움’으로의 거친 항해 대신 공무원과 대기업으로 항로를 잡는다.[사진=뉴시스]

적어도 노형사 벨이 경험하고 목격한 과거의 모든 전쟁과 혼란은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와 같은 위대함과 완성에 대한 열정으로 뭉쳐 있었지만, 마약갱들의 집단 살육극이나 허공에 뜬 돈을 들고 ‘튄 놈’이나 그놈을 쫓는 놈들의 여정이나, ‘산소통 살인마’의 여정이나 모두 ‘비잔티움을 향한 여정’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 사회에서도 요즘 노인 세대들은 소위 ‘태극기 부대’ 혹은 ‘틀딱(틀니를 씹을 때 나는 소리를 빗대 온라인 상에서 일부 젊은이들이 노인을 비하해 쓰는 단어)’으로 비하당하고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그 세대는 적어도 ‘태극기 휘날리며’ 베트남 전쟁터로, 중동의 뜨거운 사막으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에 나섰던 세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업난을 호소하는 젊은이들에게 ‘모두 중동 가라’고 비잔티움 같은 소리를 하다 젊은이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던 기억이 새롭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선배들이 서로의 팔짱을 끼고 용감하게 찾아 나섰던 ‘비잔티움’으로의 거친 항해를 사양한다. 대신 공무원과 대기업으로 항로를 잡는다. 이쯤 되면 ‘비잔티움으로의 항해’를 노래했던 예이츠도 별수 없는 ‘수꼴 틀딱’인 것인가.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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