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의 경제학···곡물가격의 역습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비가 오지 않아서다. 가뭄은 기후문제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농산물 작황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가뭄으로 인해 곡물가는 요동친다. 종합곡물지수 ‘S&P GSCI’는 사상 최고치에 근접했다. 곡물시장에 투기자본이 몰리고 있다.  공포가 밀려온다. ‘애그플레이션(agflation)’이 도래할 지도 모른다.

세계가 말라간다.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강물의 면적이 급속히 줄어든다. 가뭄 때문이다. 특히 미국이 심각하다. 56년 만에 최악이다. 도무지 비가 내리질 않는다. 불볕더위와 가뭄이 지속되면서 재난지역이 속출하고 있다.

미국 농무부는 8월 1일 가뭄재난지역으로 조지아와 아이오와 등 12개 주 218개 카운티(미국의 군郡 단위)

 
를 새로 지정했다. 이로써 미국의 재난지역은 32개 주, 1600개 카운티로 늘어났다. 카운티 수로는 전체의 절반을 넘어 섰다.

미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남미 북동부의 경우, 연초에 닥친 가뭄으로 해당 지역 강우량이 평균 75% 줄어들었다. 저수지 면적은 30% 이상 줄어, 약 37만t의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다.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그리고 러시아의 우랄•시베리아 지역에서도 올 여름 내내 가뭄이 지속됐다.
 
아시아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 동북 지역은 62년 만에 최악의 겨울 가뭄을 겪었다. 지난해 12월부터 올 2월까지 평균 강수량이 4.2㎜에 그쳤다. 이는 지난해 동북지역 평균보다 70% 이상 적은 양이다. 엘니뇨의 영향으로 올 하반기에는 동남아시아 일대에 대규모 가뭄 발생 가능성도 제기됐다.

일부 과학자는 앞으로 가뭄이 더 자주 일어나고 피해가 심각해 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항공우주국(NASA) 제임스 핸슨 소장은 지구온난화 관련 보고서에서 “가뭄과 폭염현상은 지구온난화와 연계가 있다”며 “지난 1세기 동안 지구의 평균온도는 온난화 현상으로 인해 섭씨 0.8도가량 올랐고, 기상이변은 지구 전체에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종합곡물지수 사상 최고치 육박

가뭄 피해는 땅이 마르고 물이 부족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작황부진을 유발해 곡물가격을 요동치게 한다는 점이다. 최근 국제 곡물가는 사상 최고치에 육박했다. 몇몇 농작물은 이미 최고치를 넘어섰다. 8월 3일 한국은행 조사국에서 발표한 국제경제보고서에 따르면 올 7월 20일 기준 옥수수 및 대두의 국제곡물거래가는 부셸(약 25.4㎏) 당 각각 8.25 달러, 17.58달러로 과거 최고치였던 2011년 6월10일 7.87달러(옥수수), 2008년 3월3일 15.45달러(대두)를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소맥 가격도 크게 올랐다. 역대 최고치에는 못 미치지만, 부셸 당 9.43달러로 지난해 최고 수준이던 8.86달러는 가볍게 넘어섰다.
 
이에 따라 옥수수•대두•소맥을 대상으로 작성되는 종합곡물지수 ‘S&P GSCI’도 7월 20일 533을 기록했다. 이는 2011년 3월 4일 기록했던 사상 최고치(565)에 근접한 수치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최근의 곡물가격 급등은 주요 생산•수출국에서의 기후여건 변화에 따른 작황 악화와 그로 인해 타이트해지는 수급여건이 맞물리면서 발생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A의 공포’ 뾰족한 해결방안 안 보여

이 같은 곡물가격 급등은 애그플레이션의 우려를 낳는다. 애그플레이션이란 곡물가격 상승으로 일반 물가까지 급등하는 현상을 말한다. 2007~2008년 식량부족으로 인한 곡물파동이 대표적이다. 당시의 파동 원인은 현 시점의 가뭄과는 달랐다. 화석연료 대신 곡물을 이용한 바이오연료를 활용하자는 움직임이 2000년대 들어 크게 일어나면서 생긴 일이다. 바이오연료란 옥수수에서 추출되는 에탄올 같은 것들을 일컫는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각성 움직임이 일면서 친환경에너지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옥수수•콩•사탕수수에서 추출한 바이오연료가 상당부분 소진됨에 따라 곡물가가 급등했다. 이들을 원료로 하는 사료 값도 폭등했다. 가축 값도 덩달아 뛰었다. 가축 값이 오르니 관련 제품인 우유•고기•달걀 등이 연쇄적으로 올랐다. 쌀•밀 등도 옥수수•콩 등의 대체식품으로 함께 급등했다.

결국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대부분의 식품이 올랐고 이는 글로벌 식량 위기(food crisis)의 원인이 됐다. 결국 2008년, 세계 37개국이 식량난을 겪으며 약 1억명이 굶주림에 시달렸다. 방글라데시•아이티 등에서는 폭동까지 일어났다.

앞서 말했듯 현재의 곡물가 급등은 가뭄 때문이다. 여기서 한발 짝 더 나아가면 급등을 빌미로 곡물시장에 투기적 자본이 몰리게 된다. 가뭄으로 인해 기형적인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이미 시작됐다. 투기자금이 주요 곡물의 선물(先物)시장으로 유입되며 가격 상승폭을 확대시키고 있다.

▲ 가뭄에 의한 곡물파동으로 애그플레이션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옥수수 선물시장의 투기자금(비상업자금) 순매수포지션이 6월 5일 9.0만 계약에서 7월 24일 30.6만 계약으로 240% 증가했다. 소맥 선물시장의 투기자금 순매수 포지션도 6월 19일 마이너스 1.0만 계약에서 7월 24일 플러스 6.1만 계약으로 전환됐다. 대두 선물시장의 투기적 순매수 포지션은 5월 1일 26.0만 계약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후 6월 5일 17.7만 계약으로 감소했다가 7월 24일 24.5만 계약으로 다시 증가했다. 농산물 지수에 투자하는 파생형 상품이나 상장지수펀드(ETF) 또한 지속적인 수익률을 보이며 돈이 몰리고 있다.

이에 따라 그간 소외산업으로 분류되던 농업이 차세대 유망산업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상품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로저스 홀딩스의 짐 로저스 회장은 “농산물의 재고량이 역사상 가장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며 “유일한 해결책으로 더 많은 인재를 농업분야에 보내야 하며, 앞으로 농업은 세계경제에서 가장 전망이 밝은 분야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류의 근간산업인 농업이 새롭게 각광받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팍팍하다. 투기자본으로 인해 애그플레이션이 유발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뾰족한 해결방안이 없어서다. 이미 세계적으로 돈이 많이 풀렸다. 2008년 말 이후 각국 중앙은행이 푼 돈은 5조 달러에 이른다. 그것이 시장에 채 흡수되기도 전인 2010년 초, 유로 가입국 그리스에 경제 위기가 닥쳤다. 이는 유럽전체의 금융위기로 확산됐고, 이의 구제를 위해 수천억 유로가 다시 풀렸다.

투기를 진정시키고 곡물가를 다잡기 위해선 긴축정책을 펴야한다. 그런데 이것이 만만치 않다. 현재 글로벌 경제체력은 바닥상태다. 긴축을 견뎌낼 힘이 없다. 그러니 돈을 풀기도 거둬들이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 같은 딜레마는 세계경제를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이처럼 가뭄으로 인해 파생되는 경제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도 올 초 큰 가뭄을 겪었다. 기상청에 따르면 올 5월 1일부터 19일까지 서울에 내린 비는 10.6㎜로 평년치 173.9㎜의 5.8% 정도에 불과했다. 이는 기상 관측이 실시된 1908년 이후 104년 만에 나타난 최저 수치다. 여기에 고온 건조한 날씨가 겹치면서 전국 논과 밭에 작황피해가 이어졌고 곡물가가 뛰어올랐다.

다행히 7월에 접어들면서 비가 내렸다. 가뭄을 씻어 내린 ‘단비’였다. 농가의 걱정이 가시고 곡물가가 안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단비는 멈추질 않았고 ‘홍수’로 돌변했다. 안정되나 싶던 곡물가격이 다시 꿈틀거리는 계기가 됐다. 이후 18년 만의 폭염이 찾아왔다. 그리고 곧 글로벌 곡물파동이 우리나라를 덮칠 기세다.

급기야 정부가 나섰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지난달 25일 축산단체•곡물 관련 협회•소비자단체 등 16개 기관단체가 참석한 가운데 간담회를 개최했다. 농림수산식품부 식량정책과 관계자는 “2008년 애그플레이션 때 추진했던 사료 및 화학비료 구입자금 지원, 밀과 콩의 무관세화, 쌀가루를 이용한 밀가루 대체 등을 재추진하기로 했다”며 “이에 더해 곡물의 공공비축 확대 및 금융시장을 활용한 수입곡물가격 안정화 방안 등도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국제 곡물의 가격 변동은 4~7개월 시차를 두고 국내 물가에 반영된다. 따라서 올 연말쯤이면 글로벌 가뭄으로 인한 곡물파동을 국내 소비자들도 체감하게 될 전망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연말까지는 어느 정도 물량이 비축된 상태라는 점이다.

실제보다 걱정 지나치다는 지적도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금년 말까지 필요한 밀•콩•옥수수의 물량 1426만t 중 1385만t을 확보하고 있는 것
▲ 곡물 중 쌀은 가격이 안정적인 편이다.
으로 나타났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콩과 옥수수는 12월 가공물량까지, 밀은 11월 가공물량까지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대신증권 이선경 연구원은 “4분기까지 사용할 곡물이 대부분 확보되어 있어 최근의 곡물가 급등은 내년 이후에나 문제될 수 있는 이슈”라며 “투기세력의 주도로 급등한 곡물가는 미국의 수확기 도래, 남미 파종 시기 도래 등으로 점차 안정화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곡물폭등의 우려가 실제보다 크게 부각됐다고 지적한다. 유로지역 국가채무 위기 심화로 세계 곡물수요가 둔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과거 곡물가격 급등 때와는 달리 쌀 가격이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때문에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권은 애그플레이션의 우려가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프레드릭 뉴먼 HSBC 아시아태평양 리서치 공동대표는 지난 7월 중순 발표한 보고서에서 “(곡물 파동을 유발하는)콩과 옥수수 보다는 쌀과 유가가 아시아 곡물 가격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크다”며 “쌀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만큼 지나친 염려는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증권가에서는 가뭄 관련주들의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비료업종과 농화학업종, 빙과류를 생산하는 제과업종 등이 혜택주로 떠올랐다. 특히 농화학•비료 관련주가 관심을 끈다. 가뭄 때문에 줄어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비료사용을 확대할 것이란 기대감 때문이다.

반면 음•식료 관련주는 원자재가격 상승 우려로 고전이 예상된다. 신한금융투자 김정윤 연구원은 “최근 곡물가격 상승에 따라 곡물 수입 비중이 높은 음식료 업종에 대한 우려 섞인 시선이 존재한다”며 “하지만 해외매출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음식료 업체들의 실적은 견조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Issue in Issue - 애그플레이션의 또 다른 위험 인자들

바이오에너지와 가뭄만이 애그플레이션을 유발하는 건 아니다. 신흥국의 소득수준 향상과 경작면적의 축
 
소도 유발원인으로 꼽힌다. 중·장기적인 위험인자들이다.

세계 곡물경작면적은 1980년대 중반까지 증가세를 유지하다가 점차 축소되고 있다. 미국농무부(USDA)에 따르면 2011년 현재, 세계 곡물경작면적은 6917만ha로 1981년(7356만ha)의 94% 수준이다. 신흥국의 산업화 및 도시화 진전 등이 면적 저하의 이유로 지적된다.

경작면적이 좁다는 것은 그만큼 작황작물도 줄어든다는 얘기다. 이는 타이트한 수급여건을 가속화시켜 곡물급등의 원인이 된다.

신흥국의 소득수준 향상 또한 곡물가 급등을 야기할 수 있다. 소비에서 식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선진국이 20%를 하회하는 반면 신흥국은 30%를 상회한다.

특히 중국과 인도가 주목된다. 이들은 세계 인구 1.2위를 다투는 신흥국이다. IMF에서 발표한 이들 나라의 국가 GDP는 중국이 2위, 인도가 10위로 뛰어올랐다(2011년 명목소득 기준).

이들의 소득성장은 대규모 곡물수요를 불러일으킨다. 이에 반해 공급은 수요를 따라가기 어렵다. 앞서 말했듯 경작면적 축소와 그로인한 더딘 생산성 등이 발목을 잡아서다. 결국, 인구가 많은 신흥국의 경제성장은 곡물가의 인상과 그로 인한 애그플레이션을 유발할 수 있다.

유두진 기자 ydj123@thescoop.co.kr|@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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