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구니의 비명

자고 나면 물가가 오른다. 라면값이 오르면 햇반가격이 오른다. 다음날은 맥주값이 또 뛴다.  손에 들려 있는 장바구니에서 ‘비명’이 들려오는 것 같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주부들의 가슴앓이가 깊어지고 있다.

▲ 몇 년 전까지만 해도 5000원에 하던 수박 한 통 가격이 2만원 가까이 하고 있다.
강서구 등촌동에 사는 주부 황모씨. 그는 비교적 저렴한 마트 자체제작 상품(PB)을 구매하러 대형마트에 갔다가 낭패를 봤다. 사려고 했던 우유가 동이 났기 때문이다. 황씨가 사려던 1L짜리 우유는 1400원에 팔린다. 유명 브랜드 1L짜리 우유값은 2250~2500원으로 손이 선뜻 가지 않는다.
황씨는 과일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의 할인상품은 수박. 7㎏짜리 수박 한 통이 1만5960원이다. 마트 직원은 “내일부터는 수박 가격이 2배 가까이 오른다며 얼른 구매하라”고 재촉한다. 수박 한 통에 5000원 하던 때가 불과 몇 년 전인 것 같은데 한통에 3만원이나 주고 사먹어야 한다는 현실이 공포스럽다.

황씨는 수박 구매를 포기하고 주말에 삼겹살이나 구워 먹을 요량으로 정육 코너로 자리를 옮겼다. 국내산 삼겹살은 1근(600g)에 1만4000원. 정육 판매를 담당하던 직원은 삼겹살 한근 가격이 원래는 1만7880원이었는데 가격이 많이 떨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이 역시 부담스럽다. 하는 수 없이 옆쪽에 진열된 캐나다산 삼겹살로 눈을 돌려 보지만 탐탁지 않다. 저녁 11시가 되자 식품코너에 사람들이 몰려든다. 타임 세일 때문이다. 수산물 코너에는 엄청난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날 팔리지 않은 수산물을 50% 할인 판매해서다.

▲ 수산코너에서 타임세일을 진행하자 주부들이 몰렸다.
황씨는 원래 4000원이던 관자를 2000원에, 2000원에 팔리던 바지락 한 봉지를 1000원에 샀다. 다행히 마을버스 왕복 차비는 번 것 같다. 하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다. 마트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해도 살 게 많았는데 막상 집어온 물건은 얼마 되지 않아서다.

# 월 200만원 버는 30세 직장인 김모씨. 청주에 가족이 있는 그는 서울 논현동서 70만원 짜리 월세를 얻어 살고 있다. 결혼자금으로 50만원의 적금을 붓는 김씨. 매달 5만원의 차비와 휴대폰비ㆍ보험금ㆍ관리비 등을 낸다. 한달에 들어가는 고정 비용을 전부 빼고 나면 월 50만원 정도가 김씨 손에 쥐어진다.

고물가에 시달리는 주부
그가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여윳돈은 식비에 달려 있다. 얼마나 아껴 장을 보느냐에 따라 대형커피 전문점서 카페라떼 한 잔이라도 사 마실 수 있다. 그녀의 식생활 대부분은 가공식품으로 대체된다. 야근으로 밤을 자주 새워 시간이 부족해서다. 그런 그는 밥을 지어 먹는 대신 햇반을 사먹는다. 시간 절약도 가능하고 남길 걱정도 없다. 반찬으로는 참치찌개를 가끔 끓여 먹는다. 김치와 참치캔만 있으면 ‘뚝딱’ 만들 수 있어서다. 바쁜 회사일로 저녁을 자주 거르는 그는 가끔 야식으로 라면을 끓여 먹는다.

 
김씨는 조만간 ‘멘붕’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그가 즐겨 먹는 가공식품 대부분이 가격을 대거 올려서다. 일단 햇반값이 많이 올랐다. CJ제일제당은 햇반 가격을 기존 1280원에서 1400원으로 10% 가량 인상했다.
김씨처럼 한달 20개 햇반을 구매하게 되면 2400원의 지출이 추가로 발생한다. 참치찌개에 넣어 먹는 동원 살코기 참치(100g) 3개짜리 묶음도 4900원에서 5380원으로 올랐다. 김씨의 단골 야식 ‘삼양라면’도 등을 돌렸다. 원래 가격 700원에서 770원으로 10%나 올랐다. 즐겨 먹던 레쓰비 캔커피는 17원 오르더니 칠성사이다는 40원, 펩시콜라는 33원 올랐다.

이쯤이면 화가 나서 맥주라도 한 캔 마셔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또 하나의 불편한 진실이 그를 기다린다. 하이트진로가 올 7월 말, 500mL 병맥주 출고가를 1019.17원에서 107 9.62원으로 가격을 60원 올렸기 때문이다. 가끔 가던 대형 커피전문점도 자제해야 할 듯하다. 커피빈은 올 7월 말 전 제품의 가격을 300원씩 올렸다. 동시다발적인 물가인상으로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오르라는 월급은 안 오르고 애꿎은 물가만 줄기차게 치솟아서다.

닐슨코리아가 올 5월 서울시와 4대 광역시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국민 절반 이상이(53.2%) ‘물가 안정’을 주요 사회 이슈로 꼽았다. 응답자의 96.0%가 ‘1년 전과 비교해 식품, 생활용품 등의 생필품 가격이 전반적으로 올랐다’고 밝혔을 정도로 국민이 체감하는 물가는 살인적이다.

국민 대부분이 가계 경제에 부담을 미치는 가장 큰 요인으로 꼽은 것도 ‘식료품비’다. 무려 41.8%의 응답자가 가계 경제 부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식료품비라고 말했다.

문제는 최근 식음료 업계가 가격을 경쟁하듯 인상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어제 라면 값이 오르면 오늘은 햇반, 다음날은 맥주값이 오르는 식이다. 눈뜨고 일어나면 ‘오늘은 뭐가 올랐나’ 하고 궁금해 해야 할 판이다.
손에 들려 있는 장바구니에서 ‘비명’이 들려오는 것 같다. 가격인상을 단행한 업계 목소리는 한결 같다. 국제 농수산물 원자재의 계속된 가격상승으로 부담이 누적돼 가격인상이 불가피했다는 것이다. 물가관리를 관여하는 국세청•농림수산식품부 같은 정부부처의 물가인상 자제 압박이 최근 들어 완화됐기 때문이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원자재 가격이 올라도 정부 눈치를 보느라 참고 있었던 업계가 이명박 정권 말기에 들어서며 한층 풀어진 분위기 속 가격인상 욕구를 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유통업 관계자는 “정부가 지난 4월까지 물가관리를 적극적으로 관여해 식품업체들이 가격인상을 자제했지만 하반기에는 가격인상을 강행하겠다는 입장”이라며 “추석을 앞두고 가격인상을 둘러싼 신경전이 계속될 것 같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런 가격인상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최근 미국과 남미의 가뭄으로 국제 곡물가격이 급등하고 있어서다. 8월 초 국제 밀•콩•옥수수 가격은 지난해 말보다 25~ 36% 급등했다. 올해 3대 곡물의 주산지인 러시아•미국•남미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가뭄과 고온현상이 발생해 수확량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예년 같으면 특정 지역만 생산량이 줄어드는 식이었지만 올해는 3대 주요 산지가 한꺼번에 피해를 당해 가격이 얼마나 폭등할지 전망조차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러시아•인도 등 다른 국가의 작황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동유럽과 러시아는 가뭄에 시달리고 서유럽은 평년을 웃도는 강우로, 인도는 이상 몬순(계절풍)으로 흉작이 번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이같은 위험에 심각하게 노출돼 있다. 식량과 사료용 밀•옥수수•콩 등 주요 곡물 90% 이상을 외국에서 수입하기 때문이다. 콩도 마찬가지다. 소비량 90% 이상을 외국에서 들여오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김화년 박사는 “밀•옥수수•콩 세 곡물의 가격이 동시에 30% 오르면 한국 소비자물가는 0.2% 상승하고, 가격이 100% 오르면 소비자물가는 0.7% 이상 상승하게 된다”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라면 옥수수•밀•콩의 세 곡물 국제 곡물 가격이 10% 오를 때마다 한국의 소비자물가가 약 0.07% 상승하게 된다. 6월 1일부터 7월 말까지 세 곡물 국제 가격의 평균 폭등폭은 약 40%다. 김 박사의 말대로라면 최근 벌어진 세 곡물의 가격 폭등으로 한국 소비자 물가는 향후 0.28%의 상승 압력을 받게 된다.

주목할 점은 6월 시작된 국제 곡물 가격 폭등이 아직 물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장 전문가와 식품, 사료업계 전문가들에 따르면 옥수수•밀•콩 등을 국제 거래 시장에서 ‘선물(先物)’로 사는데 상품 계약 후 곡물이 국내에 도착하기까지 종류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3~6개월이 걸린다. 이르면 올 9월, 늦어도 올 12월에서 내년 1~2월까지는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한석호 부연구위원은 올 7월 31일에 열린 ‘국제곡물시장 동향과 대응 전략 세미나’에서 “내년 1분기에는 제분(밀가루) 가격이 올해 2분기보다 27.5% 오를 것이고, 전분은 13.9%, 식물성 유지(식용유)는 10.6%까지 가격이 인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식품 외에도 콩과 옥수수로 만드는 사료값 역시 8.8% 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사료 가격이 오르면 소•돼지•닭 육류의 가격도 함께 오른다는 것이 문제다.

곡물 가격 폭등이 국내 육류 가격까지 끌어 올려 전체 식료품 가격인상으로 번질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은 현재까지의 곡물가 인상분만 국내에 반영돼도 내년 초 제분(27%)•두부(10%)•우유(4%)의 가격 인상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했다. 물가 불안요인은 국제 곡물가 외에도 널려 있다. 국제유가는 100달러 선에서 다시 올랐고 오랜 폭염과 가뭄으로 채소류 값도 뜀박질 하고 있다. 이미 최근 인상된 전기요금이 추가인상 될 예정으로 공공요금도 잇따라 오를 전망이다.

김미선 기자 story@thescoop.co.kr|@itvf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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