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❸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코맥 매카시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매카시는 소설 제목을 아일랜드 시성詩聖 예이츠(Yeats)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의 첫 구절에서 따온다. 예이츠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말로 자기 세대와 그 이전 세대가 품었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정이 사라진 젊은 세대를 개탄한다.
 

1980년대 미국에선 화이트칼라뿐만 아니라 블루칼라마저 공통체적  ‘끈끈함’을 잃기 시작했다.[사진=아이클릭아트]
1980년대 미국에선 화이트칼라뿐만 아니라 블루칼라마저 공통체적 ‘끈끈함’을 잃기 시작했다.[사진=아이클릭아트]

영화 제목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흥미로운 장면이 극 초반부에 전개된다. 파출소에서 부보안관을 목졸라 죽인 안톤은 한적한 고속도로에서 차 주인을 살해한 후 자동차를 강탈한다.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던 안톤은 주유소 겸 잡화점에 나타난다. 주인인 노인이 계산대 뒤에서 안톤을 쳐다보지도 않고 “여긴 가물어서 큰일이다. 댈러스도 이렇냐”고 무심하게 말을 건넨다.

시골 잡화점은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나 다름없다. 우리네 아낙네들이 모이는 우물가와 마찬가지다. 노인은 잡화점에 들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시시콜콜 잡담을 나누는 것이 거의 일상이다. 그러나 외지인에게 버릇처럼 건넨 이 무심한 인사말이 노인을 생사의 기로로 몰아넣는다.

아무말 없이 계산하고 나가려던 안톤은 잡화점 주인을 지그시 응시하며 억양 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기가 댈러스에서 왔는지 어떻게 알았느냐고 되묻는다. 다분히 시비조다. 노인의 ‘아는 척’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는지 계속 밭은기침을 한다. 노인은 창밖으로 보이는 안톤의 자동차 번호판을 보고 알았다며 어리둥절해 한다. 아마도 안톤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살인 행적의 단서가 남겨질 수 있다는 점에서 예민할 문제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계산을 떠나서 일단 누군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본능적으로 기분 나쁘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혼자가 홀가분한 사람들은 누군가의 사소한 관심조차 불편하다.

 

노인의 관심이 불편한 안톤에게서 혼자가 편한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노인의 관심이 불편한 안톤에게서 혼자가 편한 현대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푸트넘(Robert Putnam)은 그의 책 「Bowling Alone(혼자 볼링하기)」에서 미국 공동체의 붕괴를 다룬다. 1995년 미국의 베스트셀러 인문교양서로 등극한 저서다. 푸트넘은 1980년대 급속하게 진행된 미국 공동체의 붕괴 현상을 다룬다. 볼링은 전통적으로 미국 블루칼라들에게 가장 보편적인 레저 활동이었다.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퇴근 후 회식하고 노래방으로 몰려가듯 그들은 볼링장으로 갔다. 퇴근 후 동료들과 가까운 볼링장에 모여 맥주 ‘병나발’을 불면서 왁자지껄 볼링을 즐기는 것이 가장 미국 공동체적인 풍경이었다.

화이트칼라들의 ‘혼자 놀기’는 오래전 이미 거의 고착화됐다. 이젠 공동체적인 ‘끈끈함’을 유지해왔던 블루칼라들마저 혼자 볼링장에 와서 조용히 놀다 간다. 왁자지껄한 볼링장의 풍경과 함께 미국의 공동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배경은 1980년 미국 텍사스의 시골이다.

안톤이 ‘굴러먹던’ 대도시는 이미 공동체 붕괴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서부 텍사스 ‘깡촌’에는 공동체가 남아있던 시대다. 공동체에 익숙지 못한 안톤과 여전히 공동체 속에 안주하던 노인의 불행한 조우遭遇였던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외계인 같은…. 안톤은 생면부지의 노인이 자신을 ‘아는 척’하는 것이 불편하고 노인은 일상적이고 무심한 인사말에 예민해하는 안톤이 어이없다.

 

카페에세 노트북을 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사람들 모습이 익숙하다.[사진=아이클릭아트]
카페에세 노트북을 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사람들 모습이 익숙하다.[사진=아이클릭아트]

팁을 받기 위해 친절할 수밖에 없는 미국 식당들도 요즘은 종업원들이 손님 테이블에 다가가 ‘필요한 거 없냐’고 자주 묻지 않는다. 아무리 상냥한 미소를 머금고 물어도 대도시 손님들은 그것이 불편하다. 손님이 필요해서 부르기 전까지는 내버려 두는 것이 최상의 서비스다. 우리 사회에서도 신세대를 고객층으로 하는 상점에서 손님이 먼저 묻기 전에는 점원이 말을 건네지 않는 ‘무관심 서비스’가 확산하고 있다. 그들은 누군가 나에게 ‘안물안궁’인 말을 건네고 그에 대응해야 하는 행위가 귀찮고 짜증난다. 커피 전문점마다 노트북을 놓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사람들 모습이 익숙하다. ‘혼밥족’도 낯설지 않고 편의점에도 혼자 먹는 도시락 코너가 점점 늘어간다.

요즘은 퇴근 후에 회식을 제안하는 부장님은 진상 취급당한다. 심하면 ‘갑질’로 매도될 수도 있다.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보며 출근해 자기 할 일만 한다. 퇴근 후엔 곧바로 집에 가든지, 자기계발을 위해 학원을 가든지, 혼자만의 취미생활을 하기를 원한다. 스마트폰 하나면 필요한 정보를 다 얻을 수 있는데 굳이 동료들과 어울려 ‘안물안궁’인 말들을 들어주면서까지 함께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 ‘혼자 볼링(Bowling Alone)’하는 사회로 진입하는 모양이다.
김상회 정치학 박사 sahngwhekim5353@gmail.com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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