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와 다른 길 걷는 피처폰

휴대전화 시장에 스마트폰 열풍이 분 지 8년이 지났다. 사람들은 피처폰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통계는 다른 결과를 보여준다. 지금까지도 휴대전화 이용자 10명 중 1명은 여전히 피처폰을 사용하고 있다. 이들이 피처폰을 쓰는 이유가 뭘까. 더스쿠프(The SCOOP)가 피처폰을 열어봤다.

노키아는 2월 열린 ‘2018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에서 신제품으로 피처폰을 출시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노키아는 2월 열린 ‘2018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에서 신제품으로 피처폰을 출시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국내에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알려진 건 아이폰이 국내에 처음 출시된 2009년 11월이다.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수천가지 기능을 제공하는 아이폰은 소비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아이폰의 인기는 대단했다. 출시한 지 10일 만에 국내에서 10만대가 팔려나갔다. 그러자 국내 휴대전화 제조업체들도 뒤질세라 ‘겉만 스마트한’ 휴대전화를 내놨다. 폴더폰, 초콜릿폰 등이 주름 잡던 휴대전화시장은 스마트폰으로 빠르게 재편됐다. 이를 증명하는 통계도 있다. 2010년 3월 143만명이었던 스마트폰 가입자수는 2년 만에 2571만명으로 17배나 늘었다.

스마트폰 이전에 출시된 기존 휴대전화엔 ‘피처폰(feature phone)’이란 새 이름이 붙었다. 피처폰은 스마트폰은 아니지만 통화 외에 다양한 기능·특색(feature)이 있는 휴대전화란 뜻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는 피처폰을 “구글의 안드로이드, 애플의 iOS 등 범용 운영체제(OS)를 탑재하지 않은 휴대전화”로 정의하고 있다. 앱을 다운할 수 없는 휴대전화를 피처폰이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다.

통신업계는 무선호출기 ‘삐삐’가 그랬던 것처럼 피처폰도 휴대전화시장에서 종적을 감출 것으로 내다봤다. 그런데 통계는 흥미로운 말을 한다. 과기부에 따르면 올해 3월 피처폰 가입자수는 701만9159명으로 전체 휴대전화 가입자수(5640만1065명)의 12.4%를 차지하고 있다. 2010년 스마트폰 열풍이 분 지 8년이 지났지만 피처폰은 여전히 시장 속에서 살아남고 있었다.

피처폰의 저력이 대체 뭘까. 아이러니하게도 통신업계에선 피처폰의 한정된 기능을 꼽는다. 전화와 문자만 갖춘 피처폰을 원하는 소비자층이 있다는 얘기다. 중고 휴대전화 판매점 관계자는“수험생, 고시생,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부부 등 피처폰을 구매하러 오는 고객들이 종종 있다”면서 “스마트폰은 중독성이 있으니 피처폰으로 전화나 문자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통신업체들도 이런 수요층을 인식하고 있다. 알뜰폰업체인 SK텔링크는 지난해 6월 수험생을 타깃으로 한 ‘공신폰’을 출시했다. 공신폰의 기반은 중국 스마트폰 제조업체 ZTE의 보급형 스마트폰이지만 내부 시스템을 바꿔 인터넷과 와이파이 기능을 막고 앱도 다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실상 피처폰이나 다름없다. 공신폰은 출시 이후 월 평균 2000대씩 팔렸다. 알뜰폰협회 관계자는 “알뜰폰 업계에서 단일 모델, 그것도 피처폰이 2000대씩 팔린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10명 중 1명은 피처폰

저렴한 가격도 피처폰의 장점으로 꼽힌다. 예컨대, 지난 3월 26일 KT에서 출시한 LG전자의 피처폰 ‘LG폴더’의 출고가는 22만원이다. 선택약정할인 25%를 적용하면 18만7500원까지 내려간다. 여기에 ‘LTE음성 18.7’ 요금제(1만8700원)를 쓰면 통신비는 단말기 가격까지 포함해 월 2만800원만 내면 된다.

KT 관계자는 “다른 통신사에 비해 KT 피처폰 사용자는 월 230만명 수준에서 꾸준하게 유지되고 있다”면서 “그만큼 소비자들이 피처폰에 만족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어서 KT에서도 피처폰 고객을 위한 요금제를 꾸준히 출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피처폰이 스마트폰보다 월등히 뛰어난 점도 있다. 바로 보안성이다. 스마트폰은 PC처럼 항상 인터넷에 연결돼 있고 다양한 앱을 다운받을 수 있다. 그래서 해킹과 악성코드에 취약하다. 해커카 해킹앱을 설치해 원격으로 스마트폰을 조종할 수 있어서다. 반면 앱 다운로드를 지원하지 않는 피처폰에선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게 어렵다. 인터넷까지 차단돼 있다면 해킹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박춘식 서울여대(정보보호학) 교수는 “설령 설치되더라도 스마트폰을 타깃으로 한 대부분의 해킹 프로그램은 피처폰에서 작동하지 않는다”면서 “피처폰에서 정보 유출이나 원격 조종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 어려운 이유”라고 말했다.

물론 피처폰이 태생적인 한계를 갖고 있는 건 분명하다. 현대인들은 스마트폰에 설치된 앱을 통해 소통하고 콘텐트를 만든다. 카메라·연산처리 등 스마트폰의 스펙이 빠른 속도로 향상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태명 성균관대(소프트웨어학) 교수는 “앱은 스마트폰을 끊임없이 발전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면서 “앱을 지원하지 않는 피처폰은 시간이 지날수록 도태될 것”이라고 말했다. 피처폰의 심플함이 아무리 매력적이더라도 시대의 흐름마저 역행하는 건 무리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반론도 있다. 스마트폰의 스마트함과 복잡함, 다기능을 싫어하는 소비자들은 생각보다 숱하다. 미국의 스타트업 ‘라이트’에서 만든 ‘라이트폰’은 그런 소비자들을 타깃으로 출시된 제품이다. 라이트폰의 화면에는 그림이 없이 글자만 떠오른다. 불필요하다고 여긴 그래픽을 모두 없앤 것이다. 전화와 문자, 주소록 등 기능도 제한돼 있다. 시대에 역행한 듯한 이 제품은 크라우드 펀딩에서 목표액의 270%를 달성했다.

이택광 경희대(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교수는 “‘구별짓기’란 소비문화가 있다. 이는 인기가 많은 제품 대신 마이너한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자신과 다른 사람을 차별화하려는 것이다”면서 “복잡한 기능의 플래그십 스마트폰 대신 단순한 기능과 디자인의 피처폰을 사용하려는 소비경향이 강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피처폰은 삐삐와 다르다”

단점이 보완된 피처폰이 속속 출시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 2월 노키아가 출시한 ‘노키아8110’은 22년 전 론칭했던 피처폰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속은 달라졌다. 4G를 지원해 빠른 인터넷 속도를 체감할 수 있다. 페이스북·트위터 등의 SNS와 구글맵·구글메일 등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기능도 갖췄다. 그럼에도 가격은 79유로(약 10만1890원)다.

박형우 신한증권 애널리스트는 “성능이 업그레이드되고 LTE를 지원하는 모델이 등장하면서 피처폰의 편의성이 좋아졌다”면서 “해외에선 신흥국, 국내에선 복고풍의 휴대전화를 찾는 소비자들 위주로 피처폰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종찬 더스쿠프 기자 bellkick@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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